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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관계연구원
작성일 2019-11-18 00:00:00
제목 중국을 감동시킨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다시, 태항산을 가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2019.11.15 09:59:18

 

 

2016년 여름 학생들과 함께 태항산 답사에 나섰다. 남장촌에서 석문촌으로 가는 길에 일행은 '눈에 호사'를 마음껏 누렸다.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불리는 태항산록이 눈 앞에 펼쳐졌다.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 상영생 관장은 이 아름다운 풍경이 70여년 전에는 전쟁의 포화 속에 있었다고 하면서, 최근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태항산에 정기적 답사를 한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상 관장은 "이곳 태항산이야말로 신중국이 태어나게 된 상징적 장소의 하나이며, 또한 한중 공동항일투쟁의 현장이다. 몇 해전에는 윤세주의 고향인 경남 밀양의 흙과 진광화의 고향인 평양의 흙을 이들 묘역에 뿌렸다"고 한다. 남과 북이 고향인 두 독립운동가들의 열망을 그대로 담아 통일을 노래했던 후대들이 자랑스러웠다.  
 
오후 3시 20분 석문촌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 공터에 도착했다. 상영생 관장이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지 인근마을에 사는 촌로가 일행을 보고 반색했다. 안내를 받으며 열사기념관으로 올라갔다.  

주변 조경이 제법 잘 된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은 한글과 중국어를 병기했다. 단층 건물의 이 기념관은 윤세주와 진광화를 비롯한 항일투사를 기념하기 위해 2005년에 건립되었으며, 독립기념관에서 2011년 전시지원을 통해 현재 많은 한국인과 현지 중국인들의 애국교육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상영생 관장은 이 기념관은 양국이 공동으로 항일투쟁사를 기념하는 데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 촬영을 마치고 일행은 윤세주와 진광화 묘역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태항산록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에 있는 윤세주 묘소와 진광화 묘소는 그야말로 풍수지리로 보면 명당자리인 것 같다. 올라가는 길에서 묘역 왼쪽이 윤세주 묘소이며, 오른쪽이 진광화 묘소이다.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조경수 들이 이들 묘역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1942년 6월 2일 희생당한 윤세주는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진광화의 안위를 더 걱정하였지만, 결국 그도 과다출혈로 순국하였다. 한중공동항일 투쟁과정에서 순국한 윤세주와 진광화의 모습은 중국인들에게는 무한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해방일보> 1942년 7월 31일자에 윤세주와 진광화를 비롯한 조선의용대원들의 합동장례식 거행 예정 기사가 게재되었다.

윤세주가 누구던가. 약산 김원봉의 절친이자 조선의용대의 브레인 아니던가.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이곳 태항산에서 순국한 그의 모습은 중국 혁명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9월 18일 추도식에서 먼저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의 추도사가 태항산 자락으로 울려퍼졌다. 그는 조선의용대가 숭고한 국제정신에 입각해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데 그 애국적 기개의 위상을 강조했다. 국제주의 연대와 한국의 독립을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였다. 또한 그들의 희생이 한국과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며 조국 해방을 위해 일치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자유를 위하여 희생된 투사들의 생명은 영원할 것이다. 그들의 전투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싸우는 중국과 조선 국민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몸바쳐 싸운 위업은 더 많은 투사들에 의하여 계승 완수될 것이다.  

우리들은 조선의 우수한 투사들의 희생을 몹시 애석히 여긴다. 그러나 여명은 오래지 않아서 다가올 것이다. 우리들은 조선의 혁명 동지들이 화북의 우리 군민과 긴밀히 단합하여 화북의 20만 조선 인민과 더 널리 단결하여 오래지 않은 앞날에 긴 밤의 어둠을 물리치고 올 여명의 서광을 맞이하기 위하여 굳게 손잡고 용감히 적들을 무찌르고 전진하기를 희망한다(<해방일보> 1942년 9월 20일자, 「爲自由而史 生命永存」)

  
주더의 뒤를 이어 중공 정치위원 예젠잉(葉劍英)의 추도사가 있었다. 그의 추도사는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그 활동을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동방피압박민족 연대 속에서 조선의용대의 위상을 강조했다.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나가 죽음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조선의용대원들의 정신은 반파쇼 투쟁에서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국과 함께 공동항일전선을 구축하여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는데 분투해야 한다는 것으로 추도사를 마쳤다.

추도식은 밤늦도록 진행되었으며, 분위기는 더욱 침통해졌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한 11인의 전사들은 한중일 인사들의 추도 아래 영면하였다. 이들의 정의로운 희생과 불멸의 죽음은 한중간의 영원한 동지라는 인식과 반파쇼투쟁의 지속적인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윤세주를 비롯한 조선의용대원들의 희생이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예가 추도식이 아닌가 한다.
  
다음날 한단 시내에 있는 진기로예 열사릉에 도착했다. 진기로예(晉冀魯豫)는 산서, 하북, 산동, 하남을 일컫는다. 열사능원은 도로를 경계로 북쪽과 남쪽 둘로 나뉘어 있는데, 북쪽 능원에는 좌권(팔로군 총지휘부 부참모장) 장군의 묘가 있고, 남쪽 능원(진기로예 인민해방군 열사 공묘)에는 윤세주 열사의 묘가 있고, 서편으로는 진광화 열사의 묘가 있다. 정문에서 바라본 능원비는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잘 정비된 능원 정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 먼저 윤세주 열사의 묘를 찾았다. 가지런한 나무들이 열병하듯 일행을 맞아 주었다. 윤세주 열사 묘소 앞에는 검은 대리석의 묘비가 있다. 묘비에는 석정 윤세주 열사라고 각인되어 있다. 묘비의 내용을 재구성하면 대략 이러하다.
  
1919년 길림성 길림시 파호문 밖에서 13명의 결사대가 모여 '조국의 광복을 위해'라는 기치 아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석정 윤세주는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의열단 조직 후 그는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독립운동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가 의열단 사건으로 6년여를 복역한 후 다시 남경에서 또 다른 방향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은 활동영역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질적 변화를 추구하였음을 반증한다. 1942년 5월 태항산 전투에서 순국한 후 석문촌에 있는 묘를 1950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잠시 묵념으로 후생들의 인사를 대신하고 진광화 열사묘로 이동했다. 진광화 열사 묘는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묘소 옆에는 진광화 열사의 약력이 기록된 묘비가 서 있다.
  
조선혁명열사 진광화 동지 묘지. 열사의 원명은 김창화이다. 1911년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평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1년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항일의 뜻을 두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937년 광동성 중산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하였으며, 한국국민당과 조선청년전위단의 활동에 참가하였다. 193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8년 화북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중요한 사업을 담당하였다. 1941년 화북 조선청년연합회를 설립하였으며, 1942년 5월 태항산 반 소탕전에서 희생당하였다. 진기로예변구당정 군민 및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열사의 공적을 추모하여 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 기념한다. 중화민국 31년 10월 10일 세움 
 

타국에서 잠든 이분들에 대한 우리의 책무는 과연 무엇일까. 수십년간 잊혀진 공간과 세월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기억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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