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15.07.30] 금의위가 된 국정원, 여기가 명나라냐?
[2015.07.30] 금의위가 된 국정원, 여기가 명나라냐?
한중관계연구원2021-01-21

전제 왕권 시대보다 더한 국정원
임상훈 원광대학교 교수

 

 

국가정보원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보 기관으로서 국가의 안보와 관련된 정보를 다루는 기관이다. 이런 좋은 취지로 설립된 기관이 일부 권력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충실한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안전은커녕 오히려 국민을 위협하고 감시하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다. 과거 남산 시절의 안기부부터 얼마 전의 대선 댓글 의혹, 그리고 지금의 해킹 사건까지 문제가 수도 없이 많아 이제는 신선하지도 않다.

 

몇몇 권력자들을 위한 국정원의 작태는 필자로 하여금 전통시대 중국 황제의 ‘개인 정찰 부대’를 떠오게 한다. 명의 특무 기관인 ‘금의위’에 대해 살펴보며 현재 대한민국 국정원과 비교해 보자.

 

금의위(錦衣衛)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대한민국

 

명대 금의위에 대한 설명 이전에 이 시기 역사적 상황에 대해 먼저 살펴보면,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천민에서 거지, 탁발승, 홍건적을 거쳐 황제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이토록 어렵게 천하를 차지해서일까? 그는 주 씨(朱氏) 집안 자손들에게 대대로 천하를 물려주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 결과 이 시기를 ‘전제 왕권의 완성기’라고도 부를 정도로 명대 황제들의 권한은 극대화됐다.

 

홍무제의 황권 강화 노력 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신하들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었다. 건국 황제들의 필수 작업 중 하나는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물론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 927-976)과 같이 ‘배주석권(杯酒釋權, 한 잔의 술로 권력을 놓게 하다)’이라는 평화적인 권력 이양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의 건국 황제는 후손에게 안정된 천하를 넘겨주기 위해 권신들을 토사구팽했다. 시의심(猜疑心) 강하기로 유명한 홍무제는 특히나 더 심했다.

 

또한 그는 평소 자신의 황제 등극 과정과 매우 비슷한 선배 황제인 한 고조 유방(劉邦, BC256~BC195)을 존경해 평소 자신을 그에게 빗대길 좋아하였다고 한다. 한 고조가 그의 충신이었던 ‘전쟁의 신’ 한신(韓信, BC 231- BC 196)을 토사구팽한 것도 모방했다. 아니, 오히려 시대가 흐른 만큼 수백 배는 더 가혹해졌다.

 

홍무제의 대표적인 토사구팽 대상으로는 호유용(胡惟庸, ?~1380)과 남옥(藍玉, ?~1393)이 있다. 호유용과 남옥은 명의 개국공신이며, 특히 호유용은 재상까지 오른 이였다. 하지만, 이들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태도와 사당(私黨, 사사로운 모임) 조직 등의 각종 전횡에 홍무제는 그들을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결국 호유용과 남옥에게 누명을 씌워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호유용의 제거와 함께 재상이라는 관직을 파하며 재상의 모든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이로써 재상이라는 관직은 중국 역사 속에서 다시는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호람지옥(胡藍之獄)’이라 불리는 명초의 개국공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토사구팽은 14년간이나 지속됐으며, 그 희생자 수는 자그마치 4만 5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우는 아이도 울음을 멈추던 금의위

 

명초 홍무제의 황권 강화와 공신들에 대한 토사구팽, 그 이면에는 금의위(錦衣衛)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금의위는 명초 홍무제가 만든 특무기관이다. 공위사(拱衛司)·공위지휘사사(拱衛指揮使司)·도위사(都尉司)·친군도위부(親軍都尉府)·의란사(儀鸞司) 등 많은 개칭을 거쳐 홍무 15년(1382년)에 금의위(錦衣衛)로 확정되었으며, 품계(品階) 역시 정칠품(正七品)에서 종삼품(從三品)까지 지속적으로 올라갔다. 주황색 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니기 때문에 ‘제기'(붉은 비단 제 緹, 말탈 기 騎)라고도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금의위는 홍무제의 권력 강화를 위한 도구이자 황제 개인의 정찰 부대였다. 이렇기에 금의위의 수장인 금의위지휘사(錦衣衛指揮使)는 홍무제의 심복(心腹)이 담당하였고,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자체적으로 감옥과 상당히 많은 고문 기구들이 존재하여 자유롭게 정찰·체포·심문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황제의 직속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았다.

 

또한 의심스러운 이에게는 ‘선(先)조치, 후(後)보고’를 할 수가 있었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감금·심문·고문을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잘못이 없는 자를 고문하였을 경우에도 황제에게 그다지 심각한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람지옥으로 대표되는 신하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서 금의위들이 실적을 높이기 위해 각종 정보를 조작·날조·음해한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금의위의 또 다른 주요 활동은 감시이다. 시시각각 신하들을 감시하며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황제에게 보고했다. 아래에 재미난 일화가 있다. 명초에 전재(錢宰, 1299~1394)라고 하는 대신이 있었는데, 어느 날 궐에서 집으로 돌아가 아래와 같은 시를 한 수 썼다고 한다.

 

四鼓鼕鼕起著衣午門朝見尚嫌遲 
4경을 알리는 북이 둥둥 울려 일어나 옷을 입어도, 오문의 조현에 여전히 늦는 것이 싫다.
何時得遂田園樂睡到人間飯熟時 
언제나 논밭의 즐거움을 누리고, 민간에서 밥이 익는 시간까지 잘 수 있을까

 

* 4경 : 새벽 1-3시
* 오문 : 午門, 당시 명의 수도 응천부(應天府, 현 난징(南京)) 성의 정문
* 조현 : 朝見, 신하가 황제를 뵙는 것

 

다음 날 아침, 홍무제는 갑자기 전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제 시는 잘 지었는데, 어찌 ‘혐(嫌, 싫어할 혐)’을 쓰는가? 어찌 ‘우(憂, 근심할 우)’를 쓰지 않았는가?” 평소에 전재를 감시하던 금의위들이 전날 지었던 시의 내용을 그대로 홍무제에게 보고한 것이다. 이에 홍무제가 ‘여전히 늦는 것이 싫다(嫌)’라는 말이 듣기 싫으니 ‘여전히 늦는 것이 걱정스럽다(憂)’로 고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누군가가 24시간 몰래 자신을 염탐하고 있다는 사실에 당시 전재는 참으로 모골이 송연하였을 것이다.

 

금의위는 결국 홍무 20년(1387년), 호람지옥이 거의 끝나갈 무렵 홍무제에 의해 해산됐다. 황권 강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홍무제는 금의위에 감금된 죄수들을 형부(刑部)에 보내고, 고문 기구들을 불태웠다. 금의위는 후에 명의 제 3대 황제인 명 성조 영락제 주체(朱棣, 1360~1424)에 의해 다시 부활한다.

 

앞서 홍무제가 신하들을 탄압할 때 금의위를 활용하였듯이 영락제 역시 같은 목적으로 금의위를 부활시켰다. 영락제는 자신의 조카였던 명 혜제 건문제 주윤문(朱允炆, 1377~?)을 쫓아내고 황위에 오른 이로서 반대세력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다시 금의위를 부활시켰고, 결국 금의위는 황제의 수족이 되어 명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며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현대판 금의위 대한민국 국정원

 

이처럼 금의위는 황제 1인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붙잡아 감금·심문하던 행위를 일삼았다. 여기에서 필자는 과거 안기부가 무고한 사람을 남산으로 끌고 가 폐인으로 만들었던 사실이 투영된다. 또한 금의위가 황제 1인을 위해 신하들을 감시하고 정보를 조작·날조하던 모습은 국정원의 대선 댓글 의혹, 해킹 의혹 등과도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금의위와 국정원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금의위는 ‘전제 왕권 시대’의 산물이고, 국정원은 소위 ‘민주주의 시대’의 국가 기관이라는 점이다. 금의위의 각종 위법·폭력 행위 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무고한 사람을 강제로 감금·고문하는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지만, 시대가 달랐다. 지금의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말도 안 되지만, 전통 시대에서는 황제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있는 특성상 유능한 황제가 강력한 황권을 가지면 종종 사회가 안정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국민(民)’이 ‘주인(主)’인 ‘민주주의(民主主義)’ 사회이다. 국민의 안녕을 위한 국가 기관 국정원이 금의위와 마찬가지로 현대판 ‘황제’와 그의 ‘추종자’들을 위해 ‘신하’들을 감시하며 오히려 사회적 불안만 가중시키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또한 과거 금의위는 그래도 신하들만 감시했을 뿐이다. 즉, 과거 백성들은 결코 황제와 권신이라는 고래들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일 없이 오히려 홍무제의 강력한 카리스마 아래에서 탐관오리의 횡포에 시달리지 않고 ‘洪武之治'(홍무의 치세)라는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국정원은 민간인 사찰 의혹까지 사고 있으니 정말 내가 사는 이 나라가 약 650년 전의 ‘전제 왕조 명나라’인지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 나라가 진정으로 민주주의 국가라면 국정원은 더 이상 과거 금의위와 같이 황제와 그 추종자들을 위한 ‘개인 정찰 부대’가 돼서는 안 된다. 현재 대한민국은 피와 눈물로 이룬 민주주의국가이다. 국정원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결코 전제 왕권 시대로의 역행에 일조해서는 안 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8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