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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15.12.31] 중국, 이민족과 섞였을 때 잘나갔다
[2015.12.31] 중국, 이민족과 섞였을 때 잘나갔다
한중관계연구원2021-01-22

호한융합(胡漢融合)과 중국의 미래
임상훈 원광대학교 교수

 

 

중국은 56개의 민족이 공존하는 나라다. 하지만, 90%를 넘어서는 절대다수가 한족(漢族)이다보니 한어(漢語)와 한자(漢字)가 중국의 말과 글이 될 정도로 대부분이 한족 위주다. 또한 한족들이 소수민족 지역으로 진출하며 소수민족과 적지 않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중국의 부상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이러한 중국의 민족 문제를 확대해석하여 ‘중국 자멸론’을 운운하기도 한다.

 

중국의 소수민족과 한족간의 갈등은 자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긴 하다. 중국의 한족과 소수민족의 갈등은 과연 현재의 이야기일 뿐일까? 중국의 역사 속에서 한족과 소수민족의 대립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서로 대립을 멈추고 한족(漢)과 소수민족(胡)이 제대로 합해진 ‘호한융합'(胡漢融合)이 행해졌을 때는 무서운 발전을 보여 왔다.

 

위진남북조시대, 북조의 승리

 

한나라(BC.202~AD.220)가 멸망하고 중원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의 대분열기로 빠져들었다. 위촉오(魏蜀吳)의 삼국시대(220~280)를 거치며 서진(西晉, 266~317)에 의해 잠깐의 통일을 맞는다. 하지만, 황권다툼의 집안싸움인 ‘8왕의 난'(291~306)으로 서진은 혼란에 빠진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8왕들이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위해 변방의 소수민족들을 용병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8왕의 난은 끝났지만, 중원에 발을 들인 소수민족들, 즉 5호(胡)가 한족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영가(永嘉)의 난'(311)이라 불리는 이 난에서 서진의 수도 낙양이 함락되고 수만 명이 학살되었으며, 황제였던 회제(懷帝) 역시 포로로 끌려갔다.

 

이 결과 동진은 멸망했으며, 한족들은 본거지를 잃고 남쪽으로 쫓겨나 현재의 남경(南京)을 수도로 동진(東晋, 317~420)을 세웠다. 중원의 북쪽은 소수민족들이 차지하였으며, 다섯 오랑캐가 16개의 나라를 세웠다하여 이 시기를 ‘5호 16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439)라고 일컫는다.

 

이후 중원은 대체적으로 남쪽의 한족 왕조와 북쪽의 소수민족 왕조로 나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580)로 진입하게 되었다. 남조와 북조는 서로를 ‘도이'(島夷, 본거지를 잃고 섬과 같은 작은 땅으로 피난간 오랑캐, 소수민족이 한족을 경시하는 말), ‘색로'(索虜, 머리 딴 오랑캐, 한족이 소수민족을 경시하는 말)라 부르며 적대시하였다.

 

남북조 대립의 결론을 말하자면, 북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는 한족만으로 이루어진 남조가 한족 특유의 뛰어난 문화로 아름다움과 사치, 향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던 반면, 북조는 소수민족과 한족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배웠기 때문이었다. 즉, 북조에서는 한족들이 소수민족의 소박함과 굳건한 기상을 배웠고, 소수민족들은 한족들의 선진문물과 제도 등을 배워 호한융합이 제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국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陳, 557~589)은 북조를 통일한 수(隋, 581~618)에 의해 멸망당하며, 약 350년에 걸친 중원의 대분열은 마무리됐다.

 

▲ 구이저우(貴州)의 소수민족 ⓒ인문학습원 중국학교

 

국제적인 색채의 대당제국

 

수의 뒤를 이은 당(唐, 618~907)은 중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국제적인 색채를 띤 왕조이다. 한 예로 당의 수도이자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장안(長安)에 상주하는 외국인이 5만 명으로 추정된다니 가히 국제도시로서의 위용을 실감케 한다.

 

중국 역사를 보면 한, 송, 명 등 한족의 왕조는 폐쇄적인 반면, 원, 청 등 소수민족의 왕조는 개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당이 이처럼 문호를 활짝 열게 된 원인은 소수민족이 주류가 된 왕조이기 때문이다. 앞서 북조를 이은 수가 진을 멸망시키며 위진남북조시대는 끝을 맺었고, 당은 바로 수의 뒤를 이은 왕조이다. 당 고조 이연(李淵, 566~635) 자신이 바로 북주(北周, 557~581)의 귀족 출신이었다.

 

당의 국제적인 면모는 당 태종(598~649)대에 극에 이른다. 당 태종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소수민족들을 통합하여, 한족 세계에서는 ‘황제’로, 소수민족 세계에서는 ‘천가한'(天可汗, 하늘의 칸)으로 군림했다. 당의 개방적인 성격과 그 선진문화는 신라와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문화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당을 중심으로 한자, 불교, 유가, 율령을 공통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됐던 것이다.

 

당의 개방적인 성격은 자신의 문화를 전파한 것뿐만 아니라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이 시기 서역의 사산조 페르시아(226~651)는 새롭게 대두한 이슬람에 의해 멸망하였고, 그 왕자와 유민들이 대거 당에 망명하면서 수많은 서역의 문물이 당에 유입됐다. 특히 의자와 침대가 이때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인들의 생활양식이 우리와 같은 좌식에서 서양인과 같은 입식으로 뒤바뀌게 됐다.

 

또한 수많은 외국인들이 장안에 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당을 급속도로 쇠약하게 만든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763)의 주역인 안록산(安祿山, 703~757)이 바로 서역에서 온 소위 ‘잡호'(雜胡)였다. 또한 수많은 외국인들이 당에서 유학했는데, 그중에는 우리의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도 있다.

 

한족 배척과 원의 멸망

 

호한융합이 이루어져 무서운 발전을 보여 왔던 시기와는 반대로 소수민족이 한족을 탄압하여 예상치 않게 단명한 왕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몽골족이 세운 원(元, 1271~1368)이다. 몽골제국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대제국이었다. 3차례에 걸친 서역 정벌은 유럽인들에게 ‘지옥의 군대’라는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또한 당시 종교와 인종 등의 갈등으로 막혔던 동서교역로가 몽골에 의해 뚫리면서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동양과 서양을 오고갔다. 이를 ‘몽골의 평화'(Pax Mongolica)라고 부른다. 이처럼 강성했지만, 몽골인들이 세운 원은 한 세기를 채우지 못 하고 멸망했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대다수의 피지배층인 한족에 대한 지나친 탄압 때문이었다.

 

‘몽골지상주의’라고 불리는 원의 종족별 신분제도에 따르면, 몽골인은 최상등급, 주로 서역인을 가리키는 색목인(色目人)은 2등급, 북쪽에서 몽골인들과 공존하던 한인은 3등급, 남송 멸망 시기 끝까지 몽골에 저항했던 남송의 유민들, 즉 남인(南人)은 4등급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신분제도에 따라 한인과 남인에게는 각종 차별이 따랐다. 이들은 관리가 될 수는 있었지만, 간부직에는 등용되지 못했다.

 

더욱이 심한 것은 형벌제도에서의 차별이었다. 즉, 색목인을 죽이면 황금 40근을 내야했지만, 한인을 죽였다면 나귀 한 마리로 해결됐다. 나귀와 사람을 같은 등급으로 볼 정도이니 중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인들의 거센 저항은 불 보듯 뻔했다. 결국 백련교(白蓮敎)를 중심으로 홍건적(紅巾賊)이 봉기하기 시작하면서 원은 흔들렸다. 원을 멸망시키고 명(明, 1368~1644)을 세운 주원장(朱元璋, 1328~1398) 역시 홍건적 출신이었다.

 

현대의 한족과 소수민족

 

요즘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청(淸, 1644~1912)과 비슷해 보인다. 원의 전철을 제대로 학습한 청의 만주족은 다수의 한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병행했다.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등 최대한 평등한 대우를 해줌과 동시에 변발(辮髮)의 강요 등 자신들의 통치 방식을 강요하였다. 현재의 중국도 소수민족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반분열국가법(反分裂國家法) 등 강경한 면을 병행하고 있다.

 

현재 중국내 소수민족의 문제는 가벼운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에 부정적인 언론들의 보도와 같이 중국이 자멸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 역시 소수민족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지 않는 한 안정적인 발전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여러 우대정책을 펼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신창타이'(新常態)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고도의 경제성장 시기를 지나 중고속의 안정적인 성장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해 중국은 내수 위주로 성장방식을 전환하고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한족과 소수민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 즉 과거의 완벽했던 호한융합은 어쩌면 지금의 중국이 신창타이 속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한 요건이 아닐까?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32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