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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원수’ 미국도 이용하는 베트남의 외교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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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2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베트남의 미국 활용법
춘추 시대 오(吳)와 월(越)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앙숙 중의 앙숙이었다. 하지만, 오와 월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자 서로 협심하여 무사히 강을 건넜던 일화에서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기도 하였다. 이는 원수지간이라도 같은 목적을 위해서는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최근 서로 총칼을 겨누었던 미국과 베트남이 ‘중국’이라는 같은 목적을 향해 화해와 협력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오월동주’라는 말을 연상시키고 있다.
적의 적은 나의 동료
우리에게 익숙한 ‘월남전’은 미국과 베트남의 이념 대립으로 약 10년간 벌어졌던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양국의 관계는 깊은 앙금을 남겨 지금에 이르고 있었으나, 5월 23일 베트남을 방문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 조치를 전면 해제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와 같은 행보에 대해서 비록 ‘중국과는 무관하다’라고 밝혔지만,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 베트남이 손을 잡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미국은 아시아에서 갈수록 팽창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중국의 굴기와 영향력의 증대로 고심해 오던 미국이 고대 로마 식민 통치 시절부터 주로 써왔던 ‘분할 통치(Divide and Rule)’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중국을 둘러싼 주변국들을 자신의 우방국으로 만들면서 중국과 그들의 분란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성장을 저지하며 결과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패권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현재 과거사와 영유권 문제로 중국과 마찰을 겪고 있는 중국의 주변국들, 대표적으로 일본과 필리핀 등을 포섭하였으며, 이들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 가운데 베트남은 최근 남중국해에 있는 서사군도(西沙群島, Paracel Islands) 영유권 분쟁으로 중국과 심각한 마찰을 겪고 있다. 서사군도가 문제가 되는 원인은 세계 물동량의 50% 이상이 경유하고 엄청난 자원이 매립되어 있으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서사군도의 영유권을 점하기 위하여 중국과 베트남은 1974, 1988년 남사군도 인근에서 무력 충돌까지 벌이기도 하였다.
▲ 재임 중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이 23일(현지 시각)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 주석궁에서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강대국의 침략과 베트남의 대응
그럼 베트남은 미국의 무기 수출 금지 조치 해제로 그간 쌓여왔던 앙금을 깨끗이 씻어냈을까? 각국의 이익에 따라 급속도로 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베트남의 속내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베트남이 세 차례 초강대국들의 침략에 맞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승리를 했던 역사를 살펴보면 베트남의 행보를 추측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첫 번째로는 몽골의 침략과 성공적으로 저지한 예를 들 수 있다. 몽골의 유럽 원정은 서양인들에게 무의식 중에 황인종을 두려워하는 ‘황화론(黃禍論)’을 심어 두기에 충분했다. 몽골은 파죽지세의 공격으로 이슬람을 정복하고, 거기에 러시아를 정복하여 킵차크 한국을 세워 약 3세기가량 식민지로 삼으며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이루었다.
더욱이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유럽은 저 멀리 동방에서 몽골이 이슬람을 물리쳐 오자, 이를 과거부터 존재해 왔던 ‘사제왕 요한'(Presbyter Johannes)의 전설에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즉, 사제왕 요한의 강력한 기독교 군대가 자신들을 돕기 위해 드디어 출정한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유럽은 얼마 후 사제왕 요한의 부대는 알고 보니 몽골이라는 ‘지옥의 군대'(Tatars)였다는 것을 알게 됐고고, 이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몽골의, 그것도 30년(1258~1288년)에 걸친 세 차례의 대규모 침략을 모두 막아낸 세계 유일의 국가였다.
일본도 물론 몽골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이는 일본의 지략·용맹의 승리라기보다는 지극히 우연히 불어닥친 파도 때문이었다. 더욱이 일본의 몽골 원정군이 16만 명이었던 것에 반해 베트남에 투여되었던 몽골의 병력은 약 84만 명이었다고 하니 그 승리의 값어치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1960년대부터 시작했던 미국과 전쟁에서의 승리다. 당시 미국은 세계 제1, 2차 대전으로 패권 다툼을 이어오던 유럽이 자멸한 가운데 소련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고 있었던 자본주의 진영의 패권자(霸權者)였다. 2차 대전의 승전국으로 독일의 선진 과학 기술을 소련과 함께 독점했던 미국은 당시 최강의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면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년)으로 분단된 상황이었으며 전란의 피해로 전(全)국토가 피폐화되어 있던 상태였다. 베트남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던 1964년, 미국은 전력상의 자신감으로 통킹만 사건을 일으켰고,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은 이렇게 선전포고도 없이 발생했다.
당시의 전쟁은 화력과 물자, 기술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우세인 미국의 간단한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모두가 예측했기에, 관심사는 오로지 미국이 얼마나 빨리, 어느 정도로 희생을 최소화하여 이기는가였다.
하지만, 전쟁의 과정은 모두의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신출귀몰한 전술로 미국은 고전을 거듭했고, 우리나라 등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끌어들여 베트남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73년, 결국 미국은 국내의 반전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 결과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며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마지막은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 당시 베트남을 지원했던 중국과의 사이에서 발생했던 전쟁이다. 베트남과 중국, 서로가 승자라고 주장하는 이 전투의 결과는 서로 패하고 상처를 입었던 ‘양패구상(兩敗俱傷)’이었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국 중국과 맞서 싸우고 결국은 지켜냈던 베트남의 승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베트남은 고대부터 수차례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기에 대중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같은 사회주의 진영이면서 미국과의 전쟁에서 자신을 지원까지 해준 중국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쌓여왔던 반중 감정은 쉽사리 해결될 수가 없었다. 이는 마치 같은 자본주의 진영이고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한국과 일본이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원인과 비슷하다.
역사적으로 쌓여온 감정이 기반이 된 위에 당시 사회주의 진영 내의 복잡한 국제 관계가 뒤섞여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즉, 당시 베트남은 자국 내 화교들을 모두 추방했고, 소련과 중국의 분쟁에서도 공식적으로 소련을 지지했으며, 친중국을 표방하던 캄보디아에서도 베트남은 헹 삼린(hĕng säm´rĬn)을 지원하여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했다.
당시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베트남이 베트남·미국 전쟁을 지원했던 자국을 철저히 배신했다고 여기며, 1979년 2월 17일 ‘중월변경자위환격작전(中越邊境自衛還擊作戰)’이라는 이름으로 베트남 북부 침공을 개시하였다. 당시 일설로는 덩샤오핑이 미국 카터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小朋友不聽話,該打打屁股了(어린 아이가 말을 안 들으니, 엉덩이를 때려줘야겠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관념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중국은 약 20만 명의 대군과 함께 100여 기의 항공기, 400여 대의 전차를 투입하였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은 1980년 3월 6일에서야 비로소 베트남 북동부의 랑선(Lạng Sơn, 諒山)을 점령할 수 있었다. 당초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군을 목표로 발동했던 이 전쟁에서 중국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피해만 키워갔다. 이에 베트남에 대한 ‘징벌’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랑선을 철저히 파괴하고 철군하였다.
미국을 활용하는 베트남
미국은 현재 중국의 견제와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강화라는 목표를 위해, 과거 전쟁을 벌였던 베트남과도 손을 잡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은 인류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현대의 초강대국 미국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하고, 결국 승리를 이끌어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또한 중국과의 전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비록 과거에 도움을 주었을지라도 현재의 자국의 이익을 침해한다면 강경하게 대처해왔다.
이러한 과거의 행보들을 되짚어 봤을 때 베트남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지만, 자국의 이익이 걸린 남사군도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과 손을 잡고 중국에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것으로 생각한다. 즉, 현재 베트남과 미국이 손을 잡은 것은 미국이 베트남을 활용하기 위한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베트남이 남사군도라는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국을 활용하는 면이 더 커 보인다.
우리는 종종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파병으로 ‘월남전’에 큰 의미를 두며,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해 베트남인들에게 ‘따이한(大韓)’이라고 불렸다고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 문제,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과 우리의 가입 문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매번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어서 제대로 된 외교조차 펼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강대국들과의 외교에서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며,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 이용하는 베트남의 외교술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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