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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브렉시트 바람 타고…홍콩, 독립 추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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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2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일국양제와 홍콩의 반중정서, 화합을 위한 불화
최근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발단이 된 것일까? 중국에게 반환된 이래로 그간 적지 않은 갈등을 겪어온 홍콩에서 이참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홍콩은 1997년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반환되었고, 현재까지 약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은 자본주의의 홍콩을 받아들일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50년간 홍콩의 체제 유지를 보장하는 ‘하나의 나라에 두 체제’, 즉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실시해왔다. 하지만, 2014년에 대대적으로 발생했던 홍콩 시민들의 ‘우산시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국양제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듯하다.
아편전쟁과 홍콩의 탈취
18세기, 무역을 위해 부단히도 중국의 문을 두드렸던 영국은 결국 소원이었던 청(淸)과의 무역을 개시하였다.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했던 중국의 물건들 중 도자기, 비단, 차는 유럽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차와 같은 경우는 ‘오후의 홍차’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인들의 생활양식까지 뒤바꾸어 놓았다.
반면에 영국의 수출품이었던 모직물, 면직물 등은 훨씬 질 좋은 것을 가지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이 결과 중국과 영국 사이의 무역은 중국의 일방적인 수출과 이득으로 치우치게 되었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영국은 추악한 짓을 하고 만다. 영국은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를 끼고 중국과 삼각무역을 실시하여 중국에 마약인 아편을 팔았던 것이다.
그 결과 중국 곳곳에는 아편굴과 함께 마약중독자인 ‘은군자(瘾君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소룡(李小龍) 주연의 영화 <정무문(精武門)>에서 보던 ‘동아병부(東亞病夫, 동아시아의 병든 사내)’라는 말은 바로 이 시기 아편에 찌든 중국인들을 비꼬던 말이다.
돈은 둘째 치고,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들이 폭증하자 임칙서(林則徐)라는 장군이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하고 폐기시켜 버렸다. 이에 영국은 1840년에 자신들의 정당한 ‘상품’을 강제로 빼앗았다며, 이를 빌미로 인류 역사상 가장 치졸한 전쟁인 ‘아편전쟁’을 벌였다. 극도로 부패했던 청은 영국의 철선과 철포 앞에 무참히 무너졌고, 중국은 강제로 영국과 최초의 불평등 조약 ‘남경조약’을 맺으며, 명목상으로는 ‘조차(租借)’였지만, 실상은 홍콩을 155년간 영국에게 강탈당하게 되었다.
홍콩의 중국 반환과 일국양제
남경조약으로부터 155년 후인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기 전까지 영국의 식민통치를 거쳤고, 홍콩은 영국의 아시아 진출 교두보로서 많은 발전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던 중 중국에 돌아가야 하는 약속된 시간이 이르자 홍콩과 영국에서는 큰 술렁임이 일었다. 모국(母國)인 중국은 사회주의체제이었지만, 홍콩은 자본주의 체제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하고 계획하는 중국의 사회주의에 홍콩이 편입된다면 홍콩 시민들의 개인 자본과 영국의 투자 자본 등이 중국 정부에 몰수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 지난 1997년 7월 1일 홍콩 컨벤션센터 그랜드 홀에서 열린 주권 반환식 행사에서 중국 국가 ‘의용군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중국의 오성홍기(왼쪽 2번째)와 홍콩특별행정구기(왼쪽)가 나란히 게양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한 불안감 때문인지 영국은 1979년 당시 홍콩의 총독이었던 머레이 맥레호스(Murray MacLehose)를 북경에 파견하여, 중국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영국의 홍콩 조차 기간을 연장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의 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의 강력한 반대로 예정대로 홍콩의 중국 반환이 확정되었다.
홍콩의 중국 반환 문제라는 중요한 사안을 앞에 두고 1982년부터 중국과 영국 지도자 간의 공식 회담이 시작됐다. 당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격화하던 냉전 시기였기에, 중국과 홍콩의 향방에 전 세계의 관심이 모아졌다. 중국과 영국은 여러 차례의 논의를 통해 결국 1984년 12월 19일 ‘중영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영국은 홍콩 전역을 중국에 반환하고 중국은 홍콩에 대해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선언했다.
일국양제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의 나라에 두 체제’라는 의미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시점에서 50년 후, 즉 2047년까지 중국이 억지로 홍콩을 자신의 사회주의 체제에 병합하지 않고 그들의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서로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찼던 냉전 시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병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기막힌 발상이었고, 중국은 이를 통해 영국과 홍콩의 불안을 해결하며 동시에 홍콩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결국 1997년 6월 30일, 홍콩의 중국 반환식이 거행되었고, 일국양제는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일국양제를 생각해 내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 직접 홍콩 땅을 밟고 싶다던 덩샤오핑은 반환 직전인 1997년 2월 19일에 사망하였다. 비록 그는 생전에 홍콩의 중국 반환을 목격하진 못 했지만, 그의 유언대로 그 유해는 홍콩 앞바다에 뿌려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툼이라는 소통, 화합으로 가는 길
일국양제를 실시한 지 약 20년이 되는 올해, 중국은 중영공동선언대로 여전히 홍콩에 일국양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약속대로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우산시위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홍콩의 반중 정서는 갈수록 더해 가는 것이 현실이다.
▲ 중국 당국의 2017년 행정장관 선거안에 반대하는 홍콩 민주화 시위대가 지난 2014년 9월 30일(현지 시각) 폭우 속에 우산을 쓴 채 정부청사 주변 도로에 운집해 있다. 우산으로 경찰의 최루액과 최루탄 가스를 버텨내 ‘우산 혁명’으로 불리고 있다. ⓒAP=연합뉴스
그 이유로는 먼저 사실상 홍콩에게 완전한 자유를 줄 수 없는 중국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홍콩의 최고지도자인 ‘홍콩특별행정구행정장관(香港特別行政區行政長官)’을 무리하게 친중파로 두려고 한 것이다. 기존처럼 후보들이 제약 없이 출마하고, 또 시민들이 자유롭게 투표하여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물색한 친중파 인물들만을 후보자로 내세워 홍콩 시민들이 그 안에서만 선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확실히 홍콩 시민들의 민주를 억압한 처사이다.
이 외에도 중국인들이 대거 홍콩에 유입하면서 홍콩 시민들과 적지 않은 마찰을 겪는 것 역시 중요한 원인이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인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홍콩 시민들의 일자리가 부족해졌고, 중국 여행객들의 무질서한 행위 등도 홍콩 시민들의 반중정서를 촉발시켰다. 이러한 불만이 고조되다 보니 이제는 중국과 홍콩인들 개개인 사이에서도 폭력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중국은 일국양제로 홍콩의 체제 유지를 보장한다지만, 사실상 그들의 민주와 자유를 억압하여 많은 갈등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과 홍콩이 다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50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다가 만났으니, 당연히 외모 빼고는 같을 것이 없다. 현재 중국과 홍콩의 불화는 바로 이 긴 공백을 메꾸고 다시 하나로 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경유지다.
‘소통(疏通)’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다툼은 겉으로는 ‘불화’이지만, ‘화합’으로 가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이다. 남북교류의 마지막 보루인 개성공단마저 폐쇄해버린 우리의 상황에서 만나서 다툴 수라도 있는 중국과 홍콩은 참으로 부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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