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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4] 최순실 게이트, ‘환관 정치’ 패망한 진과 판박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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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5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몇 년 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秘線實勢)’ 의혹이 최순실 사태로 사실로 드러나며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세세하게는 대통령의 한복 선택부터 크게는 연설문의 수정, 인사는 물론 자신의 딸을 위해 외압 행사까지, 일반인 최순실은 박근혜 정부의 수많은 일에 개입해왔다. 박근혜 정부가 엄정한 심사를 통해 올라온 전문 관료를 제쳐두고, 오랜 시간 인연을 맺어왔다는 이유로 일반인과 함께 국정을 운영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더욱이 고집이 완고하기로 유명한 대통령이 최순실의 ‘아바타’처럼 그녀의 지시대로 움직인 상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역사를 거울삼아 경계하기 위해서다. 지금 대한민국의 최순실 사태는 약 2200년 전 진나라를 몰락의 길로 내몰았던 환관 조고(趙高, ?-BC 207)의 전횡과 매우 비슷하다.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 했던 진이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멸망했던 역사를 보면, 지금까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대한민국의 앞날이 불안하기만 하다.
▲ 지난 10월 31일 검찰에 출두한 최순실 씨. ⓒ프레시안(최형락)
환관 정치의 대표, 조고
진(秦, BC 221-BC 207)은 약 550년간 지속됐던 춘추 전국(春秋戰國, BC 770-BC 221)의 대분열기를 종식시키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제국이다. 진시황제는 통치의 안정을 위해 각종 통일 정책을 펼쳤고, 이로써 중국은 드디어 진의 깃발 아래에서 하나로 통일된 ‘중국(中國)’이 되었다.
그러나 ‘한족(漢族)’·’한문(漢文)’ 등의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 우리가 중국을 지칭하는 대부분의 말들은 ‘진’이 아니라 그 후대 왕조인 ‘한(漢)’이다. 이러한 이유는 진이 비록 통일 대업을 달성하였지만 불과 15년 만에 망했고, 그 뒤를 이은 한이 약 400년 동안 존속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은 중국의 정체성을 완성한 위대한 업적을 고스란히 한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다. 진이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배경에는 환관 조고라는 인물이 있었다.
환관은 황가의 잡일을 처리하는 황제 직속 노비이다. 중국 역사에는 환관들이 그 특유의 감언이설로 황제를 꼬드겨 국정을 농단하다가 멸망한 왕조가 적지 않다.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웠던 점 중 하나는 중국과는 달리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환관의 전횡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통 시대에도 발생하지 않았던 ‘환관 정치’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21세기에 ‘최순실 사태’로 발생한 것은 우리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조고는 진시황제와 같은 영성(嬴姓)으로, 진의 종친이다. 잘 알다시피 진은 법가(法家)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나라이다. 마침 법률에 정통했던 조고는 진시황제에 의해 중차부령(中車府令)에 발탁되며 정계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읽었던 조고는 진시황제의 총애를 받아 18번째 아들인 호해(胡亥, BC 230-BC 207)의 교육을 담당하며 황제의 옥새를 관리하였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제는 BC 210년 50의 나이로 사망한다. 진시황제는 5번째 전국 시찰 중,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20여 명의 아들 중 급하게 후계자를 물색하였고, 결국 장자 부소(扶蘇, ?-BC 210)를 다음 황제로 내정하며 조서(詔書)를 작성했다. 당시 부소는 만리장성 수축으로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진시황제는 조고에게 조서를 가지고 부소에게 냉큼 달려가게 하였다. 그러나 부소와 관계가 나빴던 조고는 진시황제의 명을 어기고 조서를 감추고 있었다.
결국 진시황제가 급사하자 조고는 진시황제의 죽음을 천하에 알리지 않고 승상 이사(李斯, BC 284-BC 208)와 모의하여 뒷일을 계획하였다. 조고는 총명하고 인의가 두터운 부소 대신, 무능하고 조종하기 쉬운 호해를 다음 황제로 삼으며, 부소에게 자결을 명하는 조서를 날조하여 부소를 제거하였다.
아직 진시황제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한여름, 사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진동하자 조고는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그 악취를 가리고 수도 함양에 입성하였다. 그 후 조고는 그제야 진시황제의 죽음을 만천하에 알렸고, 무능한 호해를 진 이세(秦二世)로 등극시켰다.
조고의 국정 농단, ‘지록위마‘
조고의 바람대로 무능한 호해는 황제가 되자마자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조고는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조고는 먼저 자신의 반대 세력을 제거했고, 여기에는 함께 모의를 획책했던 이사도 포함됐다. 조고는 권력을 양분하고 있던 이사를 없애기 위해 특기인 각종 사실을 날조하여 결국 모반죄로 이사를 처형했다. 가족 중 남자는 모두 처형당하고, 여자는 관노가 되었으며, 이사 자신은 저잣거리에서 허리를 잘리는 요참형에 처해졌다.
조정의 전권을 장악한 조고의 폭정은 갈수록 심각해졌고, 진을 몰락의 길로 내몰았다. 충직한 신하들의 제거, 과중한 노역과 부세, 가혹한 형벌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다. 조고의 악행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라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성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어느 날 조고는 진 이세에게 말 한 마리를 진상하고 싶다고 하며, 사슴을 끌고 왔다. 진 이세가 웃으며 사슴을 어찌 말이라고 하느냐고 하자, 조고는 말이 맞다며 못 믿겠으면 신하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조고의 위압에 눌린 신하들은 조고의 말대로 말이라고 대답하였고, 양심 있는 신하들은 사슴이라고 말하였다. 진 이세가 돌아가자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신하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것이 바로 지록위마의 유래이다. 참고로 일본의 욕인 ‘바카(ばか)’는 바로 이 ‘마록(馬鹿)’의 일본 발음이며, 이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조고의 전횡과 진의 몰락
조고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전국의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진의 몰락을 나타냈던 신호탄은 바로 BC 209년에 일어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이었다. 이 난은 비록 금방 진압됐지만, 이를 계기로 항우와 유방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반진(反秦)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부패로 얼룩진 진의 정규군은 항우와 유방군 앞에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쓰러져 갔고, 결국 반란군은 수도 함양의 코앞까지 진격했다.
사치와 향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진 이세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 조고를 책망했다. 이에 조고는 사태의 모든 책임을 진 이세에게 돌리고 그를 살해한다. 그 후 조고는 자신이 황제가 되려했지만, 아무도 동의하는 사람이 없어 결국 진 이세의 조카인 자영(子嬰, ?-BC 206)에게 황권을 넘겼다.
평소 조고의 악행에 치를 떨던 자영은 곧바로 조고를 처형하고 부모와 처의 3족을 멸하였다. 자영이 진 삼세(秦三世)가 되고 46일째, 유방이 함양에 입성하면서 진은 통일 대업을 완수한 지 1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또 한 달 후 진을 극도로 증오했던 항우가 입성하여, 진 삼세를 살해하고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한 진의 수많은 문물들을 처참하게 훼손했다.
진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현재 대한민국의 국정을 농단했던 최순실의 모습과 진을 몰락으로 이끌었던 조고의 모습이 놀랍도록 유사하다.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은 조고의 지록위마와 다를 바 없다.
통일 대업을 완수했던 진,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이끌어냈던 대한민국. 하지만 조고와 최순실이라는 ‘악환(惡宦)’의 등장으로 진은 결국 멸망했고, 대한민국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여기에서 진의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전철을 밟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최순실과 관련된 모든 사안들을 철저히 규명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번 최순실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 과거 환관에게 과도한 권력을 주었던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방임했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는 절대 이처럼 역사를 후퇴시키는 황당무계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각골명심(刻骨銘心) 해야 한다
(임상훈 교수는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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