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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1] 진시황의 중국 통일, ‘적폐 청산’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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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5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극렬한 저항 이겨낸 개혁
최근 기득권의 ‘갑질’과 같은 잘못된 특권의식이 연일 폭로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 곳곳에 ‘적폐’가 얼마나 뿌리 깊게 만연해왔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다행히 현 정부는 ‘적폐청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고강도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지난번에 다룬 왕안석의 변법은 (☞관련 기사 : 역사 속 ‘개혁가’들, 그들은 어떻게 ‘적폐 청산’ 했나?) 기득권들이 자신의 이익을 고수하기 위해 극렬히 반대함으로서 결국 실패로 끝을 맺었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개혁은 성공을 거두기 매우 어려웠으나, 힘겹게 성공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었던 예도 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770 ~ BC221), 변방의 약소국에서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발돋움하며, 결국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진(秦)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대변법가 상앙
약 550년의 대분열기인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람이 진시황제(秦始皇帝, BC259 ~ BC210)라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상앙(商鞅, 약 BC395 ~ BC338)이라는 대변법가가 개혁을 단행해 진을 일대강국으로 변화시키지 않았다면, 진시황제의 천하 통일이라는 패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상앙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하나인 법가(法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래 위(衛)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성은 공손(公孫)이다. 그래서 가끔 위앙(衛鞅) 또는 공손앙(公孫鞅)으로 불리나, ‘하서의 싸움(河西之戰)’에서 위(魏)나라로부터 대승을 거두어 상(商)의 땅을 봉지(封地)로 하사받은 후 우리에게 더 익숙한 상앙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의 지도자였던 진효공(秦孝公, BC381 ~ BC338)은 춘추오패(春秋五霸)로 잘 알려진 진목공(秦穆公, ? ~ BC621)의 뒤를 이어 패자의 자리를 노리던 야심찬 이였다. 이에 그는 천하의 인재를 구하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려 다방면에서 인재들을 모았고, 상앙은 바로 이때 등용됐던 이다.
상앙이 부국강병의 변법을 실시하는 데에는 여러 장애물이 있었다. 왕안석의 변법이 기득권들의 극렬한 반발에 밀려서 실패로 끝났듯이, 상앙의 변법에도 귀족들의 반발이 역시 매우 극심했다.
이에 상앙은 먼저 당시 진의 지도자 진효공을 3번 알현하여 각각 ‘왕도(王道)·예(禮)·법(法)’을 설파하였다. 진효공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회담에서 상앙이 주장한 왕도와 예에 의한 통치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상앙이 주장했던 법에 의한 부국강병책은 단기간에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어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상앙의 법에 의한 통치와 개혁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던 진효공은 결국 상앙에게 변법을 추진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변법을 반대하는 귀족들과의 설전에서 역시 상앙은 현란한 말솜씨로 그들을 압도하여 반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하나 변법 시행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바로 백성들이었다. 진나라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실제 전쟁과 농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상앙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변법은 실패할 것이 뻔했다.
이에 상앙은 한 가지 묘책을 고안해낸다. 어느 날 남문에 나무를 놓고, 북문에 옮기는 이에게 십금(十金)을 준다고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나무를 옮기는 일 따위에 십금씩이나 준다는 사실을 믿지 않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자, 상앙은 오십금(五十金)으로 보상금을 올렸다. 결국 한 사람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시험 삼아 나무를 옮겼고, 상앙은 정말로 오십금을 상으로 주었다. 이러자 백성들은 상앙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상앙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나무를 옮겨 믿음을 세우다’라는 ‘사목입신(徙木立信)’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상앙의 개혁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변법에 대해 귀족 세력의 반발이 매우 거셌지만, 진효공과 백성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은 상앙은 흔들림 없이 변법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상앙의 변법은 크게 1·2차로 나뉜다. 그 주요 내용은 진의 방대한 영토를 고르게 발전시키고, 군대의 질을 대폭 올려 막강한 전투력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상앙은 여러 가지 변법을 시행하였으나, 여기에서는 가장 특기할만한 개혁 한 가지만 소개하겠다. 그것은 바로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신분의 고하와 관계없이 동등하게 포상하던 ‘이십등군공작제(二十等軍功爵制)’이다.
당시 귀족사회에서 백성들은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도 별다른 보상이 없는 반면, 귀족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많은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다보니 전쟁 중에 틈만 나면 도망가는 병사들이 부지기수였고, 군대의 사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상앙은 이런 ‘적폐’에 착안해 군공을 세운 자에게는 평민이라도 작위를 주고, 군공을 세우지 못한 자는 귀족이라도 엄하게 처벌하는 등 아래와 같이 군법을 재정비하였다.
상앙은 군사 5인을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만들어, 전장에서 한 명이라도 탈영하면 나머지 4명이 처벌받는 연좌제를 실시하였으나,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온 자는 면죄해줬다. 또한 군사 5인마다 둔장(屯長)을, 100인마다 백장(百將)을 두어 전쟁에서 적의 머리를 베어오지 못한 부대의 둔장과 백장은 아무리 귀족이더라도 참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 베어온 적의 머리를 장군에게 제출하여 문제가 없다면 그에 따른 작위를 얻을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현대의 장교쯤에 해당하는 갑사(甲士)의 머리 1개를 베어오면 작위 1급, 양전(良田) 1경(頃), 주택을 지을 수 있는 토지 8무(畝)를 하사받고, 작위가 없는 서자(庶子) 한 명을 부릴 수 있었으며,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됐다. 만약 갑사의 머리 5개를 베어온다면, 자신 고향의 다섯 가구의 사람들을 부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앞서 적 갑사의 머리를 베어 온 자들은 관리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갑사의 머리 하나에 55석, 두 개에 100석의 녹봉을 받는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또한 20등급의 작위를 두어 군공에 따라 작위를 부여하였으며, 작위가 있는 자만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토지와 집의 크기, 노비의 수, 무덤의 장식 등 많은 분야에서 철저하게 작위의 등급에 따라 제한하였으며, 2급 이상의 작위는 면죄부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상앙의 군공작제는 지나치게 잔인하고 엄격한 면이 없지 않지만, 평민에게 신분 상승의 공평한 기회를 줬다는 점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도 대단히 선진적이라 할 수 있다. 상앙의 이러한 정책으로 전쟁에 참가한 진나라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는 당연히 전쟁의 승리로 직결되었다.
개혁의 성과와 상앙
상앙의 이러한 부국강병책에 힘입어 진나라는 수도를 함양(咸陽, 현 섬서성(陝西省) 함양시)으로 옮기며 천하통일의 야심을 드러냈다. 변법의 성과로 힘을 비축하기 시작했던 진나라는 약 한 세기 후 불세출의 명군 진시황제가 등장하면서 결국 550여 년의 대분열기를 종식하고 최초의 ‘통일제국(統一帝國)’이라는 위업을 이루었다.
상앙의 변법은 이처럼 큰 성과를 불러왔지만, 개혁의 일등공신이었던 그의 말로는 매우 비참하였다. BC338년, 상앙의 변법의 최대 지지자인 진효공이 죽고 그 아들 진혜문왕(秦惠文王, BC356 ~ BC311)이 즉위하자, 그간 자신들의 권한을 침해당했던 귀족들이 상앙을 모반죄로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개혁들이 그렇듯이 기득권들의 부와 권력을 재분배하여 평민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 그 핵심이다. 하지만 아랫것으로 부림당하던 이들이 군공을 세워 어느 날 갑자기 자신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이 귀족들은 죽기보다 싫었나보다. 결국 진혜문왕은 상앙을 체포하여 거열형(車裂刑)에 처했고, 위대한 변법가는 이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어준 이가 처참하게 살해됐다는 점은 씁쓸하지만,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위업은 여러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있다. 우리도 현재 그동안 겹겹이 쌓인 적폐를 없애고 보다 공정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장애물과 극렬한 저항이 있다. 강력한 개혁 추진으로 부국강병을 이룬다면, 수천 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 후손들이 지금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지 않을까.
* 임상훈 교수는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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