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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의 기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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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5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모두가 주인인 나라를 만들다
3·1운동의 적장자, 대한민국임시정부
1919년 4월 10일 늦은 밤 중국 상하이 김신부로 독립사무소에서는 대한민국의 국호와 정부를 만들기 위한 임시의정원이 조직되었다. 오늘날 국회와 같은 임시의정원은 임시헌장 10개조를 만들었으며, 제1조는 오늘날 헌법 제1조 1항과 같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제국주의에서 독립된 나라 그것이 대한민국이었으며, 그 국호를 제정한 것이 바로 임시의정원이었다. 그 감격에 찬 첫걸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와 공동운명체로서 부침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립시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선구자들의 고단한 삶의 여정과 동일하였다.
2019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이 헌법적 가치에서 살아간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적장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과 동시에 기획·공포되었다. 임시정부의 조직 구성은 넓은 의미로 3·1운동의 시작과 동시에 3월 3일 국민들에게 『조선독립신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 이후 독립국가 건설의 일환으로 임시정부의 수립이 3·1운동의 목표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새로운 시대적 염원을 품고 태어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민주주의의 시발이었다. 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분단시대에 민족사의 정통성을 내세움은 물론 통일의 선제적 우선권을 장악할 수 있는 소중한 민족사적 자산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 등 국제사회와 역사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세계사적 자산이기도 하다.
고난의 이동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을 만들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물 위에 뜬 망명정부’처럼 고난의 이동시기를 보냈다. 절강성의 항저우, 강소성의 젼장, 호남성의 창사, 광동성의 광저우, 광서성의 류저우, 사천성의 치장, 충칭에 이르는 장장 수천 km의 대륙을 떠다녔다. 1940년 중경에 안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 창설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성대한 성립전례식을 거행한 한국광복군은 중국 전역에서 대일항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한민국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5년간의 중경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은 일본의 공습과 다습한 중경의 기후와도 싸워야 하는 등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한 민족의 대서사시였다. 마침내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에 남아 있는 한인들을 귀환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한반도로 귀국하는 한인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27년간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이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원형이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지하고 미래를 향한 설계를 실천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많은 주역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위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인들의 작은 책무일 것이다.
김주용 교수(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