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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19.11.04] 신장, 티베트, 홍콩과 하나의 중국
[2019.11.04] 신장, 티베트, 홍콩과 하나의 중국
한중관계연구원2021-01-28

근대, 동아시아 그리고 중국의 민족주의

김하림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근대의 동력으로서의 민족주의

 

근대 이후 시공간의 문제를 다루는 데 ‘민족’ 내지 ‘민족주의’만큼 익숙한 개념도 없을 것이다. 이제는 다분히 상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일종의 상식 수준에서 소비돼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른바 ‘상상의 공동체’ 논의를 통해 일찍이 강조되었듯이 역사적·문화적 구성물로서의 민족, 민족주의는 근대의 성립 및 그 발전 과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야말로 근대적 창안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상상’이나 ‘창안’이라 표현하건 아니면 ‘(재)발견’이라고 말하건, 민족 개념의 정립이 일정하게 필요했던 이유는 근대적 민족/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지상명제를 실현하는 데 ‘nation’ 즉 ‘민족’ 내지 ‘국민’의 일체성이 담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숱하게 가해진 ‘억압’의 역사는 일종의 보편사로서 근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그런데 그것과 동시에, 근대가 가지고 있는 다면적 성격과 마찬가지로 그 주요 동력으로 기능한 민족주의를 단일하고 고정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해도 곤란하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상상의 공동체’ 논의를 서구적 맥락에서 적용하는 경우와 동아시아를 설명하는 경우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일례로 흔히 서구사회나 학계 등에서 한국,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근대를 설명하는 가운데 자주 지적되는 과도한 민족주의적 성향은 한편으로는 우리 안의 억압성이나 폐쇄성을 성찰하는 계기로 경청할 부분이 있지만, 만약 그것이 동아시아의 근대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맹목적 비판이라면 결코 수긍하기 어렵다.

 

파시즘으로 귀결된 ‘팽창적’ 민족주의의 기억을 지배적으로 갖고 있는 서구와 달리,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강제적으로 편입된 동아시아의 역사 경험 속에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식민주의의 폭압에 대한 ‘저항’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양자 간의 서로 다른 역사 경험에 대한 면밀한 파악 없이 민족주의의 성격을 고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칫 그 역사성 자체를 소실시킬 우려가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세계를 관통하는 보편성과 각 지역, 국가마다의 특수성 및 차이를 정합적으로 이해하는 역사적 안목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근대 경험을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맥락에서 파악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근대성 논의만 해도 근대에의 적응에만 매몰된 근대주의나 근대의 폐단에 집중한 나머지 그것을 쉽게 넘어서려고 하는 탈근대주의적 시각 모두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종종 지적되어왔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양자의 이분법적 구도 자체를 문제 삼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이라는 과제가 사실은 ‘이중적 단일 기획’임을 강조한 이른바 ‘이중과제론’의 문제의식을 다시 한 번 환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어떤 국가나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재구성되는 다양한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 자칫 그것을 본질화하여 접근하게 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한 것처럼, 근대성의 지표라 할 수 있는 국민국가의 형성 맥락을 이해할 때에도 흔히 말하는 ‘해방’적 측면과 ‘억압’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특히 제국주의 틈바구니 속에서 근대적 국가 형성이라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던 동아시아 경우는 양자가 훨씬 더 역동적이고 복잡하게 얽히며 작동하였다.

 

중국의 근대 경험 속 민족주의의 역학

 

그렇다면 근대 중국의 민족주의는 어떤 성격을 지녔는가. 사실 이러한 질문 자체가 난센스라고 볼 수도 있지만 위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중요한 몇 가지 역사적 단락들을 짚어볼 수는 있을 듯하다.

 

청 말에서 민국 초에 이르는 근대 이행기에 중국 지식인들은 (서구적) 근대국가 성립요소를 중국에 적용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것은 곧 ‘중국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직면했던 고민이 다름 아닌 ‘나라의 이름(國名)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였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데, 여러 모색 끝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中國)’이 그전에 막연하게 문명권을 지시하는 말에서 국가의 명칭으로 변화, 정착되었다.

 

또한 잘 알려진 대로 양계초의 ‘신사학(新史學)’ 관련 논의는 중국이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개별 군주와 왕조의 역사를 넘어 중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국가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기본 입장을 취한 것이었다. 국사가 필요한 이유는 시간적 연속성의 담보, 즉 ‘중국’이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통일된 역사체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고, 그것이 민족주의와 애국심의 확립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이라는 ‘국명’과 ‘국사’의 확립 과정 자체가 근대적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한편, 중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영토의 범위 및 주권을 가시화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이 이뤄지는 가운데, 중국인으로서의 공통된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 중국이라는 국가와 민족을 표상하는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황제(黃帝)인데, 당시 혁명파를 중심으로 전설 속의 황제를 한인(漢人)의 시조로 자리매김시켜 칭양하는 일종의 ‘황제붐’이 일어났을 정도였다고 한다. 황제를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 외에도 황하 및 만리장성과 같은 지리 문화적 요소, 악비(岳飛), 정성공(鄭成功) 등으로 대표되는 한인 영웅들의 서사 등이 교과서를 포함한 여러 미디어를 통해 강조되고 확산된 것도 이 시점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황제가 한인의 시조로 규정되고 있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근대 초 중국의 국민국가 모색을 둘러싸고 작동한 민족주의는 국민 내지 민족의 통합성과 일체성을 목표로 사실상 한인 이외의 여러 에스닉(ethnic)적 요소를 차별화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을 띠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점은 이른바 소수민족에 대한 인식 및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데, 가령 중화민국 출범 이후 국민 및 영토에 관한 합의 과정에서 청의 판도(版圖)에 속해있던 비한인 지역의 의사나 처지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국민국가의 억압성이 잘 드러나는 대표적 사례인 것이다.

 

이러한 국가·국민 정체성의 구축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국가의 억압성은 근대로의 적응 과정에서, 특히 유사한 조건 하에서 국가 형성을 해야 했던 나라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 중국이 처한 반식민지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그 부정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다소 일면적 해석일 수 있다.

 

예컨대, 중국의 영토에 대한 의식이 영토의 일체성에 관한 명확한 인식기반 위에서 구축되었던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세력권 확장에 따른 ‘과분(瓜分)’에의 위기감에서 비로소 촉발된 것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 중국을 규정한 구조적 맥락을 함께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 중국 민족주의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언급되는 보이콧운동이나 ‘열사기념’, ‘국치기념’과 같은 정치문화의 형성 역시 열강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중국 최초의 전국적 보이콧운동은 1904년 미국의 중국인이민금지법 10년 연장 조치에 대해 항의한 반미운동이었고, 열사기념, 국치기념 역시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패전과 불평등조약 등의 ‘국치’ 역사를 기억하고 설욕을 도모하자는 공적 기억을 만들어 국민의 결집축을 형성하고자 함이었다. 식민으로부터의 해방을 모색하는 방편이었다고 하겠다.

 

더 나아가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근대 극복의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역사적 흔적들도 있다. 쉬이 국가주의로 흐를 수 있는 팽창적 민족주의 동력을 비판하는 가운데, 국민국가 밖으로는 민족해방운동 차원에서 아시아 연대를 도모하고 국민국가 안으로는 소수민족 자치와 자결권을 인정하려는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적 자세가 견지되기도 했던 것이다. 근대 동아시아가 놓인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피억압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연대감을 공유했던 중요한 사상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향방과 민족주의

 

이상에서 살펴본 근대 중국에서의 민족주의 장력과 오늘날의 그것은 연속되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양상을 보이는 지점도 많다. 그 현격한 차이가 중국의 국제적 위상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적 상황에 처해있던 근대와 달리 경제발전을 앞세워 미국과 경합하며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된 지금의 중국에게 민족주의의 역할과 기능은 다르게 부여될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중국의 행보를 보면 민족주의의 다면적 성격이 점차 국가주의라는 단일한 형태로만 수렴되는 듯 보여 심히 우려스럽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기존에 통치의 정당성을 담보했던 사회주의를 대체하여 중국 사회의 온갖 딜레마를 억제하고 조절하는 원리로서 민족주의에 강력히 호소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 최근 홍콩 문제나 신장, 티베트 문제를 둘러싼 중국 정부의 폭력적 대응을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바로 이 시점에서 ‘근대의’, ‘동아시아의’ 그리고 ‘중국의’ 민족주의의 역사를 다시 조명하는 것이 어떠한 현재적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63834#0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