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0.02.21] 100년 전 간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광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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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8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중국인이 바라본 ‘경신참변’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훈춘사건을 조작하다, 보복의 그림자
올해는 기념할 일들이 많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렸던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1920년 10월 서간도, 북간도에 몰아쳤던 학살의 광풍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제국 일본이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한국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제거하고자 독립군 토벌계획을 추진하였다. 봉천 군벌인 장쭤린(張作霖)과의 회의를 통하여 골격을 세웠다. 1920년 5월부터 8월 사이에 조선총독부, 조선군사령관, 관동군사령부, 시베리아파견군, 봉천총영사 등이 3회에 걸쳐 봉천회의를 개최하고 반일무장단체에 대한 탄압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8월 경성회의를 개최하여 일본과 중국의 합동토벌을 적극 추진키로 결의함으로써 그 계획이 완성되었다.
1920년 9월 12일 마적 만순(萬順)이라는 자가 주동이 되어 훈춘현성을 습격하였다. 이를 제1차 훈춘사건이라고 한다. 이때 마적단은 훈춘 중국경찰서, 육군병영, 헌병대병영, 현공서를 습격하고 감옥에 있는 범법자 30여 명도 석방했다. 이 때 한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한인상점 15개소가 약탈당하고 6명이 납치되었다.
이 사건이 수습되기도 전 10월 2일 제2차 훈춘사건이 발생하였다. 마적단 진동(鎭東)이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이 살해되었으며, 중국인과 한인 150여 명이 납치당했다. 하지만 이 훈춘사건은 제국 일본이 조작한 것이다. 바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기 위하여 자국민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마적을 매수하였다.
1920년 10월 중순 제국 일본은 마적단 토벌과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군대를 파견한 실질적인 목적은 간도지역에 대한 확고한 세력부식과 함께 항일독립군에 대한 철저한 탄압에 있었다. 일제는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고 있던 제19사단을 출병하여 간도에 거주하고 있던 이주 한인에 대한 야만스러운 탄압을 전개하였다.
중국 신문이 보도한 ‘경신참변의 서막‘
호남성 창사(長沙)에서 발간된 <대공보>에서는 일제가 간도에 출병하는 명분 가운데 하나를 ‘현지 주민의 요청’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간도 정보에 의하면 천보산 방면에는 반역적인 생각을 가진 조선인의 횡포가 심하고 다시 습격당해서 민심이 매우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계속 전했다. 중국측은 수비대와 경찰력이 부족해서 결국 토벌할 힘이 없었다. 일본 거주민 가운데 지방을 향해 피난 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광산회사 대표가 일본에게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대공보> 1920년 10월 17일 자, 「琿春事後之雜迅」).
<대공보>가 정보를 받아서 보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간도정보 제공자의 주체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일본이 제공한 정보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동경전보를 인용하여 일본의 군대 출병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다. 1920년 10월 7일 새벽녘에 회령을 출발하여 그날밤 윤동주의 고향인 용정촌에 출병 군대가 거주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간도지역에 군대를 출병하기 위한 사전작업이 훈춘사건의 조작이라면, 출병으로 인한 한인사회의 통제의 표본은 일본사령부의 포고문이었다. 1920년 10월 18일 일본군 사령부 명의의 포고문은 간도출병이 훈춘사건과 연계해서 불가피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선전하는데 주요한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대공보>에는 훈춘지역에 게재된 포고문의 내용을 실으면서 일본 병사들이 지속적으로 중국 땅에 들어오고 있는 상황을 보도하였다. 포고문의 내용이다.
우리는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며 국민의 권리를 절대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우리들의 목적은 중국 정부 및 군대와 연합하여 진행하고 서로 도우면서 중국 전 국민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다. 우리 군은 중국 관병과 함께 마적을 소탕하기를 원한다. 마적을 소탕하여 중국 인민의 복리를 증진시키는데 노력하니 진심을 다해 우리 군을 돕기 바란다.
간도출병의 원인을 훈춘사건에서 찾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일본이 줄기차게 선전하였던 것인데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군대파견 목적이 중국 국민의 행복을 바라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북경정부와 협의를 지속적으로 추진했지만 실질적으로 일제는 자국 교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미 간도지역 각 지방에 주둔하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둔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행세하면서 중국관리의 입장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임의로 이주 한인을 조사하고 단속하였음을 보도하였다. 일제는 한 발 더 나아가 조선군사령관 명의로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게시하여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바로 강력한 탄압과 적절한 당근, 그것이었다.
포고문에 대해서 <대공보>는 일본인의 이중성을 간파했으며, 북경 거주 외국인의 말을 인용해서 일본군의 이번 침략이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될지도 모른다며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 시점부터 <대공보>는 훈춘사건과 간도침략에 대한 중국의 대응을 본격적으로 언급했다.
그 대안으로 먼저 중앙정부 차원에서 간도 일대를 세계 여러 나라의 주재원이 상주할 수 있을 정도의 개방도시로 바꾸고 길회철도를 시급히 개통하여 그 관리권을 중국이 장악해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전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길회철도 문제는 반드시 해결함으로써 일본세력의 진출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된다고 보도하였다.
제노사이드를 고발하다
1920년 10월에 불어 닥친 일제의 이른바 ‘간도출병’의 광풍은 북간도뿐만 아니라 만주전역의 한인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한인들의 피해보다도 자신들의 영토에서 자행되었던 일제의 대륙침략의 실상이 더 큰 위협으로 다가왔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제가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지방에 허락한 것은 주권국가 중국으로서는 치욕 가운데 하나이다. 그만큼 폐해도 컸다.
<대공보> 1920년 10월 28일자에 처음으로 한인 희생자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한인 8명이 숨졌으며, 훈춘 대황구에서 3명이 총살되었다는 것이다. 화룡현 동명학교에 대한 탄압도 보도했다. 일본군이 학교장과 교사 및 학생들을 모아놓고, 교사를 전소시켰으며 부근 12가구도 불태웠다.
일본군대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귀화 한인들을 상대로 국적변경을 요구하였으며, 그 강도는 중국 관리들의 범위를 넘어섰다. 한인들이 일본국적에 귀화한 수는 4603명에 달하였으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중국에 입적한 귀화 한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이주 한인을 학살하였다고 했다. 예를 들면 일본군은 용정 장암동(일명 노루바위골)에서 40여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불을 질러 두 번의 학살을 자행하였다. 지금 장암동에는 그 기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경신참변을 보면서 이 사건이 산동사건 못지않기 때문에 북경정부는 이를 인식하여 세계조사위원회를 조직함으로써 중국의 주권을 더 이상 침해받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일제가 북경정부의 어떠한 건의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는 국제연맹에 호소하는 것이 당시에는 최선의 길이라고 인식한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제국 일본군대가 1921년 5월까지 중국 땅을 점유하였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학살하고 이주한인 사회를 초토화했던 제국 일본은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1931년 9월에 만주를 집어삼킬 이른바 만주사변(9.18)을 일으켰다. ‘제노사이드’, 인류가 가장 경계해야 할 범죄이다. 경신참변 100년 한국인이라면 100년 전 간도에서 벌어졌던 학살의 광풍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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