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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0.07.24] 중국에서 떠오르는 ‘애국 소비’, 중국에만 좋은 일?
[2020.07.24] 중국에서 떠오르는 ‘애국 소비’, 중국에만 좋은 일?
한중관계연구원2021-01-28

역사를 통해 본 중국의 ‘궈차오(國潮)’ 마케팅

유지원 원광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2018년 3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시작된 미‧중간의 무역전쟁은 최근 홍콩 문제와 겹쳐지면서 더욱 심각한 위기로 치닫고 있다.

 

특히 홍콩 보안법 발효 직후 영국이 ‘재외교민여권'(BNO)을 소지한 300만 명가량의 홍콩인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히자, 중국이 “노골적인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했고, 영국 정부도 최근 자국 5G 이동통신 사업에 중국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의 참여를 배제하고 기존 장비도 제거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중국과 영국의 관계도 급격히 냉각되고 있다.

 

이러한 대외적 위기상황 하에서 요즘 중국에서는 2018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궈차오(國潮)’ 마케팅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강력한 소비 트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궈차오’라는 말은 중국의 전통 문화를 의미하는 ‘궈(國)’와 트랜드라는 뜻의 ‘차오(潮)’가 결합된 단어로, ‘궈차오 상품’은 중국化(화), 트랜드化, 글로벌化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추면서 중국문화의 특징을 구비한 중국 디자이너들이 만든 브랜드 제품을 가리킨다.

 

최근 한국무역협회 베이징지부는 차이나 마켓 리포트(CHINA Market Report)에 발표한 <중국 브랜드의 굴기(崛起)와 애국마케팅>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최근 미중 무역분쟁 장기화에 따른 중국 내 위기의식 고조, 자국산 제품 품질 개선, 정부의 로컬 브랜드 강화 정책 등으로 중국 소비자들의 자국 브랜드 선호 성향이 점차 확산”되고 있으며, 특히 “1990년대 출생을 뜻하는 ‘지우링허우’와 2000년대 출생을 뜻하는 ‘링링허우’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음”으로써 10~20대 소비자를 중심으로 자국 문화와 제품을 중시하는 ‘애국 소비’가 확산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보고서에서는 “중국 정부도 ‘제조대국’에서 ‘제조강국’으로의 전환을 꾀하며 로컬 브랜드 강화 정책을 잇달아 발표하는 등 자국 제품 이용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중국에서는 ‘궈훠정땅차오(國貨正當潮 : 국산이 바로 트랜드이다)’의 열풍이 불고 있음을 주지시켰다.

 

보고서는 “우리 기업들도 제품과 서비스 등에 있어서 중국 문화를 접목한 ‘궈차오(國潮) 마케팅’을 적극 활용하는 한편 가성비를 뛰어넘는 프리미엄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중국의 ‘궈차오(國潮)’ 마케팅은 한국과 중국 양국의 역사 속에서 이미 수차례 경험했었다. 바로 직전의 경험으로는 작년 2019년 우리나라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일본 상품 불매운동(NO Japan)을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운동이 여러 차례 발생했었다. 바로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물산장려운동’과 해방 후 일본의 역사 왜곡 및 망언 등으로 인한 일본상품불매운동 등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1995년 광복 50주년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때나 2001년 일본 후쇼사 출판사 역사 왜곡 교과서 파동, 2005년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2011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때의 불매운동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불매운동과 관련된 활동으로는 바로 1920년대 ‘조선물산장려운동’을 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는 일본 상품이 밀려들어 옴으로써 우리의 민족 산업은 매우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많은 민족기업들이 도산하거나, 일본 자본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경제는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3·1운동 이후 민족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시작은 1920년 7월 20일에 조만식(曺晩植)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자작회(自作會)가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소비조합을 비롯한 민족기업의 설립을 촉진시키면서부터 이다. 그 후 인천을 거쳐 1923년 1월 9일 20여 개의 민족단체 대표 160여 명이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져갔다.

 

이 운동의 기본정신은 민족 기업을 세우고 국산품을 애용해 경제 자립의 토대를 닦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일제가 이 운동을 새로운 민족 운동으로 간주하고 탄압하게 되면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게 되었고, 참여 열기도 줄어들게 되어 결국은 유야무야되었다.

 

이렇게 일제의 경제 수탈과 민족 말살 정책에 항거해 일어났던 물산장려운동은 국산 제품을 써서 민족 자본을 형성하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조선의 경제 자립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외화(外貨)배척운동은 20세기 초부터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다양하게 발생하였다. 그 중에 최근 중미관계와 무역전쟁 그리고 ‘궈차오’ 유행과 관련하여 볼 때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1905년에 발생한 ‘미국상품불매운동(The Anti-American Boycott of 1905)’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미국상품불매운동’의 배경이 된 것은 소위 ‘중국인 배척법안(Chinese Exclusion Law)’이다. 이 법안은 모든 중국인 노동자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고 중국인의 미국 입국에 제한을 두는 것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15개조로 구성되었다.

 

이는 1882년 5월 미국에서 입안되어 몇 차례 개정과정을 거쳐 1894년 당시 주미 중국 공사와 10년간 효력을 갖도록 조약이 체결되어, 1904년에 그 효력이 만료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조약의 개정을 요구하였지만, 미국 측은 철저히 무시하면서 여전히 중국인을 차별하는 조치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중국인에 대한 차별적 대우가 ‘미국상품불매운동’을 촉발하게 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905년 5월 10일 중국 상해(上海)의 상무총회(商務總會)는 다음 두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된다. 첫째는 미국 정부가 ‘중국인 배척법안(Chinese Exclusion Law)’을 더욱 강화하려는 개정시도를 중국 정부가 앞장서서 반대해야 하며, 둘째는 미국 정부에게 2개월 내에 ‘중국인 배척법안(Chinese Exclusion Law)’을 철회하도록 요구하며,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상품불매운동을 포함한 반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상품불매운동은 1906년 초까지 계속되었는데, 초기 단계에서는 각급 상인단체 등이 주도하여 상품불매운동 형식으로 진행되다가, 1905년 7월 말 필리핀 화교 출신으로 미국에서 노동자로 불법 체류하다가 체포되어 송환된 풍하위(馮夏威)가 상해 미국 영사관 앞에서 배척법안 철회와 상품불매운동을 촉구하면서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더욱 과격해졌다.

 

이 때부터 주도 계층도 상인단체 뿐만 아니라 소상인, 학생, 관료 등 으로 다양해지고 다수의 민중들이 적극 참여하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운동의 성격도 상품불매운동 단계를 뛰어 넘어 반미운동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렇게 중국에서 미국상품불매운동이 시작되자 처음에 미국은 중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운동세력을 진압하려 했지만, 운동이 더욱 과격해지면서 확산되자 무력사용까지 검토하였다가 중국 현지 사정에 밝은 주중 외교관들의 반대로 포기하게 되었고, 결국은 중국 측 요구사항을 반영한 新배척법안으로 개정하는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6년 들어 중국 내 미국상품불매운동이 점차 쇠퇴하고, 4월에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인하여 법안 개정 반대 세력의 입지가 강화됨으로써 법안 개정도 무산되었다.

 

중국에서의 미국상품불매운동은 비록 ‘중국인 배척법안’을 폐기하거나 개정하지는 못하였으나, 미국의 영사제도와 이민국 관리들의 태도변화 그리고 책임자 처벌 등을 이끌어 낼 수는 있었다.

 

이후에도 중국에서는 1908년 이진환(二辰丸)호 사건으로 상해(上海), 광서(廣西), 홍콩 등지에서 발생한 일본상품배척운동이 있었다. 또한 오사운동 시기에도 전국에 걸쳐 일화(日貨)배척운동 및 국산품(國貨)애용운동 등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이밖에도 1925년 광주(廣州)에서의 영국 상품 배척운동과, 만주사변 발생 후 1931~32년의 일본 상품 배척운동도 일어났다.

 

이상에서 살펴본 중국에서의 외국 상품 배척운동 중에서 1905~06년에 전개된 미국상품불매운동은 최근 중국에서 불고 있는 ‘궈차오(國潮)’ 열풍과 대비해서 생각해 볼 때 시대적 상황, 국제관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현격하게 다른 배경이 많아서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1905~06년의 미국상품불매운동은 당시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대미외교를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힘으로 ‘중국인 배척법안’의 폐기‧개정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대중(對中) 정책 변화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는 운동이었다.

 

현재 중국의 ‘궈차오(國潮)’ 열풍이 중국 내 소비 진작을 이끌어낸다면, 이는 내수시장 확대와 대외무역의 성장으로 이어지면서 국제경제 발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분명 있을 것이다. 즉 ‘궈차오(國潮)’ 열풍으로 중국의 로컬 브랜드가 우수한 품질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면, 거시적으로 볼 때 이는 곧 세계 경제에도 공헌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만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 시대에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애국적 민족주의는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의 ‘궈차오(國潮)’ 열풍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적 이기주의로 변질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72317312147996#0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