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2020.06.04][전북도민일보] 경술국치 110년 기획특집 관련 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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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2-04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만세의 기운, 독립운동으로 꽃피다
3·1 독립선언서(출처-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만세(萬歲)의 단어는 모호하다. 만세에는 만인(萬人)의 일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만세는 개인과 민족, 나아가 국가의 정체성을 아우르게 만든다.
특히, 만인이 공통의 지향점을 가졌을 때 그 힘은 극대화된다. 사전적으로 만세는 ‘바람이나 경축, 환호 따위를 나타내기 위해 두 손을 높이 들면서 외치는 말에 따라 행하는 동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은 ‘만세’하면 ‘3·1운동’을 먼저 떠올린다. 이는 만세가 3·1운동을 통해 생명력을 얻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31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전주 서문교회
■일제침략, ‘독립운동의 씨앗’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됨으로써 500년 역사 조선왕조가 끝을 맺는다. 통감부는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되는 순간 모든 기관을 접수하고 사후 처리에 착수한다.
같은 해 10월에 설치한 조선총독부는 사회·문화·정치·경제 등의 분야에서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무단통치를 강행한다. 이때 일제는 가장 먼저 한반도의 국토를 유린한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식량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고 농토를 수탈한다. 대대로 농사를 짓던 농민은 경작권을 박탈당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반면에 전국토의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소유하게 된 조선총독부는 토지를 일제 토지회사와 이민에게 무상 또는 헐값에 불하(拂下)한다. 이로 인해 일본인 대지주가 출현하게 되고 한반도에 거주하던 농민의 삶은 더욱 비참해진다.
또한, 수많은 젊은이가 전쟁터와 일터로 내몰리면서 고향을 떠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사람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물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떠나는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후 일주일 지난 29일에 조약 체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국민의 각성을 촉구한 애국지사도 무수히 많다.
또한, 항일운동을 계승하고 3·1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의병의 항일투쟁도 지속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강화된 무단통치에 의해 곤경에 빠진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장과 의병은 체포되어 교수형과 장기형, 그리고 총살 등으로 순국한다. 의병활동은 이후에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의 전신으로서, 그 의미와 가치가 매우 크다.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 박사가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촬영한 모습 –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의 기운이 움트다
1910년대는 세계가 격변한 시기이다. 격변의 중심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가 사라예보 사건을 이유로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동맹국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발발한다.
4년간 계속된 전쟁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항복으로 1918년에 끝난다. 1919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의 후속 처리를 위해 연합국 지도자들은 프랑스 베르사유에 모여 ‘파리평화회의’를 진행한다.
이때 미국 윌슨 대통령이 국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칙으로 14개 조항을 제시한다. 이 조항에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한 민족에서 발생한 문제는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이다.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구체적인 정책이기보다는 국제적 약속에 대한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던 세계의 모든 약소민족에게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근대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재미동포 이승만(李承晩), 민찬호(閔瓚鎬), 정한경(鄭翰景)을 한국대표로 선정하고 파리평화회의 참석을 추진한다. 미국 정부가 여권을 발급하지 않아 실현되지는 않지만, 일본에 있는 유학생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국외의 활발한 움직임과 달리, 국내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전달조차 되지 못한다.
일제가 언론을 통제하고 ‘민족자결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은폐에도 불구하고 도쿄 유학생의 귀국, 재미동포와 재중동포의 활동을 통해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국내에 알려진다.
국내에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퍼졌다고 해서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진영에 가담했던 일본은 승전국의 일원이 되어 국제적 입지를 더욱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3·1운동이 움트기 시작한다.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일본 유학생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8독립선언 ‘3·1운동’을 꽃피웠다.
1918년 7월, 일본에서는 일본 역사상 최대 민중폭동인 쌀값 인하시위가 일어난다. 4년 전보다 4배나 폭등한 쌀값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민중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7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해 300곳의 쌀 상점과 지주를 습격하자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기에 이른다. 민주화 사회운동의 시발점이 된 이 시위는 일본에 거주하던 유학생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당시 일본 유학생 모임을 주도하던 학우회는 1919년 1월 6일 조선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에서 해외 동포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들도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함을 주장한다.
독립운동을 실행할 대표를 선발하고 비밀화합을 가진 일본 유학생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한다. 2월 8일 오전 10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정부 관련 기관, 신문사, 잡지사, 학자에게 우편으로 발송한다.
오후 2시 조선 YMCA회관에 모인 600여 명은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일본 유학생의 독립선언서 낭독은 국내 지식인, 학생, 종교인에게 큰 영향을 준다.
송계백이 1919년 1월 하순에 중앙고보 현상윤과 송진우에게 유학생의 거사 소식과 함께 전달한 ‘2·8독립선언서’ 초안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비교적 활동 제약이 적었던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 준비가 이뤄진다. 독립을 준비하던 학생세력과 힘을 합쳐 대중적이고 평화적인 독립 시위를 전개하기로 의견은 모은 이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전국 각지에 전달 하기로 결정한다.
1919년 3월 1일, 최남선이 기초하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가 집집마다 배달된다.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 5천여명도 독립선언식을 치른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날 즈음 군중 속에서 ‘대한독립만세’소리가 군중 속에서 터져 나온다.
3월 1일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상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진다. 일본의 무력 탄압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2천여회 정도 진행됐으며, 참가자 수 또한 200만 명이 넘는다.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9년 10월 임시정부 직원들의 모습 – 독립기념관 제공
■ 전북지역 3·1운동의 특징과 가치
3·1운동에서 지방의 만세시위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은 편이다. 그러나 지방의 만세운동을 중앙운동에 호응해 일어난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지방에서 거행된 3·1운동 역시 중앙과 마찬가지로 지역 인사의 의지와 결단, 지방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진행된다. 지방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3·1운동이 전 민족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도교의 인종익과 기독교의 이갑성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전북지역의 3·1운동이 시작된다. 3월 6일 군산 장날에 만세운동을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면서 3월 5일 만세운동을 거행한다.
동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전북지역에서 천도교는 만세운동에 많은 영향력을 미친다. 군산·익산·전주를 중심으로 확산한 전북지역의 만세운동에 천도교가 모두 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다른 지역의 3·1운동과 구별되는 전북지역만의 특징이다. 천도교는 3·1운동 당시 종리원 조직을 활용해 독립선언서를 빠르게 전파함으로써 만세운동 확산에 이바지한다.
전북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도움을 받는다. 전북지역의 기독교계 학교는 만세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한다. 근대교육을 받은 학생이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점 역시 전북지역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주로 장날을 이용한 전북지역의 3·1운동은 체포된 이들의 석방 요구가 주를 이룬다. 일제는 전북지역의 3·1운동에 무력진압으로 대응한다. 일제의 무차별 진압에 많은 사상자가 속출 ]하지만 전북지역의 독립 운동가는 굴복하지 않고 만세를 외친다.
천도교도, 기독교도, 각급 학교생도, 농민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전북지역의 3·1운동은 거족적 민족운동의 면모를 보여준다.
■3·1운동 이후의 독립투쟁 의미와 양상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3·1운동의 결과물은 민족의 독립이 아닌 일제의 간교한 지배정책이다.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미명 아래 유화책과 민족의 단결을 저해하는 정책을 동시에 펼친다. 이에 독립 운동가들은 3·1운동을 거울삼아 실정에 맞는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국내의 독립운동은 지하활동으로 변화하고 해외의 독립운동이 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통치의 흐름속에서 독립투사들은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사건을 계기로 항일전선을 다시 정비한다.
또한, 임시정부의 독립군으로서 1940년 9월에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한다. 나아가 중국 연안에서는 조선독립동맹이 1942년 7월에 조선의용군을 편성하고 중국공산당과 연합해 항일전쟁에 참가한다.
국내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조직이 만들어진다. 추후 이들 조직은 건국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과 협력하면서 그 조직을 점차 확대해 나간다.
3·1운동은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결과를 보면 큰 성과를 내지 못한다. 3·1운동의 목적이 국권 회복과 민족자주에 있었기에 외부적인 평가만 놓고 보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내부적인 관점에서는 민족사적·사상사적·경제사적인 측면의 성과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민족사적 관점에서도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할 기회로 작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3·1운동은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과 아직도 우리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만세의 기운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뷰> “3·1정신은 미래 사회를 이끌 시대정신”
원광대학교 HK+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 박성호 연구교수는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바뀔 때마다 그 시대에 맞는 시대정신이 형성됩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정신이 있습니다. 바로 3·1정신입니다. 3·1정신은 모진 세월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우리 민족의 자양분입니다. 어쩌면 절대 꺼질 수 없는 정신에 가까울 것입니다. 3·1정신은 한국인의 영원한 시대정신인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기미독립선언서에 담긴 3·1정신을 재해석하고 대한민국의 현재, 나아가 미래 사회에 적용해야 합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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