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0.08.13][전북도민일보] 경술국치 110년 기획특집 관련 기사
[2020.08.13][전북도민일보] 경술국치 110년 기획특집 관련 기사
한중관계연구원2021-02-04
1945년 해방, 조국으로 돌아오는 험난한 길
 
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과 그들의 삶 <8회>
38선을 건너기 위해서는 미군의 검속을 통과해야 했다.
38선을 건너기 위해서는 미군의 검속을 통과해야 했다.

■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의해 무조건 항복으로 일제의 기나긴 식민통치는 막을 내렸다. 동북아시아 지역에는 그동안 일본에 의해 억눌려 있었던 한국과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 저 멀리 대서양 건너 미국까지 몰려들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의 전변을 예고하고 있었다.

1945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만주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216만3,115명으로 추산된다.

전라북도뿐만 아니라 조선팔도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피해, 또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던 이들이 그토록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 후 승리한 연합군은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일본으로의 인양(引揚)을 명령했지만 일제에 의해 만리타국으로 끌려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을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일어났던 만주지역 전북인 마을내 작은 소란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친일파들을 잡으러 마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앞장서서 한국인을 괴롭혔던 일명 ‘장몽둥이’를 잡으러 온 마을 사람들이 들고 나섰다. 장몽둥이는 일본경찰의 하수인으로 앞장서서 툭하면 한국인들을 마구 몽둥이로 때렸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그렇게 크게 작게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방의 소식이 들려오자 마자 사람들은 집으로 향했다. 장몽둥이는 마을사람들에게 쫓겨 한 집의 가마솥 밑 아궁이로 대피했다. 그러자 그동안 당한 것이 많았던 사람들은 아궁이 밑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그렇게 ‘친일청산’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시기 중국은 만주지역의 영향력을 되찾고자 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별도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주력부대인 13군과 52군, 6개 사단 7만명을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총 22개 사단 31만8천명을 만주지역에 투입했다.

이에 대항해 중국 공산당군은 13만명의 동북인민자치군을 투입해 만주지역을 점령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송화강 지역을 경계로 송화강 이북은 공산당, 이남은 국민당이 통치하게 됐다. 전북인들이 다수 거주했던 안도현은 백두산 밑으로 양쪽의 세력이 번갈아 영향력을 행사했다.

1946년 2월 28일 만주서 인천항으로 도착한 조선인 귀환자들
1946년 2월 28일 만주서 인천항으로 도착한 조선인 귀환자들

■ 국민당의 ‘한교(韓僑)’ 정책 ‘외국인은 떠나라’

중국 국민당은 만주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한교(韓僑)라고 불렀다.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 중국인들을 화교라고 부르듯, 중국에 가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한교라고 부른 것이다.

국민당은 한국인들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했다. 중국 땅으로부터 내보내려는 정책을 취했던 것이다. 국민당 정부의 ‘한교처리 임시방법’에 따르면 ‘생산에 종사하지 않거나 적당한 직업이 없는 한교는 일률적으로 모집하여 먼저 귀국시킨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잠시 체류자’와 ‘즉각 송환자’로 분류됐다. 특별한 직업이 없는 이들은 ‘즉각 송환자’로 3개월 이내 추방이 결정됐고, 직업이 있는 이들은 ‘잠시 체류자’로 분류해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됐다.

시한부 삶의 종식은 재산의 몰수로 더욱 가속화됐다. 1946년 4월부터 국민당 정부는 ‘한교처리 임시방법’ 제9조 규정에 따라 만주일대 한국인의 재산을 무조건적으로 차압했다.

안도현이 위치한 길림성 일대 한국인들은 연길시에 집결시켜 1개월간 수용 후 3개월 이내에 한국으로 추방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1947년 2월에는 정책을 다소 완화 시켰다. 전범자와 범죄자를 제외한 일반인들의 재산과 토지경작권을 인정해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점령지내 대부분 한국인들은 공산당 점령지로 이주하거나, 국내로 귀환을 결정하게 됐다. 귀환은 1946년 12월부터 시작됐고, 고향이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1차 귀환은 본래 15,000명으로 계획했으나 2,483명만이 고국을 밟게 됐다. 이유는 교통편 부족과 날씨 때문이었다. 1차 귀환자들은 12월 22일 중국 심양을 출발해 후루다오(葫蘆島)에 도착했다. 이어 24일, 미군이 제공한 배를 타고 인천과 부산으로 귀국했다. 다음해 9월에는 1만명의 한국인들을 인천, 목포, 부산 등지로 송환시키려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1946년 8월, 중국 투먼에서는 귀환을 목적으로 한국인들이 몰려들었는데, 콜레라가 발생해 임시 거처에 머물렀던 한국인 300여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콜레라가 점차 확산되자 두만강 국경을 폐쇄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에 정착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기차나 선박을 이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도보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기차나 선박을 이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도보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 중국 공산당 ‘소수민족 정책’, 이중 국적 허용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는 다른 정책을 취했다. 공산당은 광복 이전에도 조선족을 여러 소수민족 하나로 인정하고 있었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과의 거대한 연합전선을 추구하는 전략의 일부이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거해 동북의 각 소수민족(몽골인, 한국인, 만주족 등)이 중국인과 똑같이 경제, 정치와 문화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음을 선포한다’고 규정했다.

1945년 9월 중국 공산당 동북국(東北局)은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인정하며 한족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하도록 할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러한 정책방향은 한국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만주로부터 내보내고자 한 국민당의 정책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적으로 길림성은 평등정책을 추진했고, 당시 연변주(오늘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총 책임자였던 유준수는 만주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결단을 내린다.

곧, 한국인들이 차별받지 않고, 기존의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법적 안전망을 확보한 것이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으로 인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만주지역에 남게 됐으며, 그들이 오늘날 조선족의 조상이 됐다.

그렇지만 이 시기 큰 혼란 속에서 안전하게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국인들은 만주지역 한국인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중국인들의 땅을 헐값에 빼앗아 일본인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거나, 일부 한국인들이 아편장사를 해 중국인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에서 작성한 ‘동북 접수지구 한교 피해 조사표’에 따르면 해방 직후 중국인의 핍박으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심양 44명, 장춘 85명을 비롯해 176명의 한국인이 사망하였고, 부상당한 사람은 심양 63명, 안산 200명, 개원 700명, 장춘 237명, 길림 289명 등 1,866명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구금 3,468명에 물리적인 피해는 아니더라도 모욕을 당한 이들이 12만8,085명으로 집계되는 등 수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인, 한국인이 뒤섞여 있는 도항 모습

■ 가자,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고향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의 혼란, 국민당과 공산당의 서로 엇갈리는 정책 속에서 안도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전북인들에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회고에 의하면, 만주에 남아있기보다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광복이 난다는 소문이 나기 전부터 그때 일본사람들 앞에서 개질하던 사람들, 돈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된 사람들이 슬금슬금 먼저 도망을 갔다오. 광복이 나자 혼란한 판에 우리 마을의 절반 이상 되는 집들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떠다니는 마을에는 47호만 남게 되었소” 정해련(무주 출신 1927년생)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100가구 단위의 마을에는 대체로 절반 이하로 남게 되었고, 빈집에는 중국인들이 들어오거나, 혹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새로운 삶의 형태가 구성됐다.

안도현을 떠난 전북인들은 목단강 시(市)를 거쳐 연변으로 이동해 도문시(圖們市)를 경유해 두만강을 건너거나, 아니면 안동(오늘날의 단둥)을 경유해 압록강을 건넜다. 1930년대 후반의 집단이주는 일률적으로 철도를 이용해 압록강을 건넜으나 해방 후 혼란기는 철도와 도보, 선박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활용됐다.

그러나 국경을 건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해방 후 짧은 혼란기에는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지만, 소련군이 북한지역을 점령한 이후 만주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지방정부에서 발행한 증명서가 없으면 국경 앞까지 왔다가 다시 되돌아 갔다.

만주에서 전라북도까지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 길에는 중국군, 일본군 패잔병, 소련군이 있었고, 함께 길을 걷는 이들로 자신의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민간인들도 함께 있었다.

서로 경계하고 또 같은 고생을 공유하는 가운데 승자와 패자, 피해자가 뒤섞인 복잡미묘한 귀향길은 이어졌다.

압록강, 또는 두만강에서 한번 멈칫했던 귀향길은 38도선에서 다시 한 번 장애물을 맞게 됐다. 한반도를 분할통치한 미군과 소련군은 치안유지를 구실로 남과 북의 통행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만주로부터 힘들게 걸어 내려온 이들의 몰골이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미군은 중국의 지방정부가 발행한 증명서가 영어로 쓰여 있지 않다고 퇴짜를 놓기도 했다.

해방 후 전북도청에서 발행한 안내문(출처 전주역사박물관)
해방 후 전북도청에서 발행한 안내문(출처 전주역사박물관)

■ 민족 해방의 그날, 전북의 정세

만주로부터의 귀환이 한창 진행되던 시점, 전북지역에서는 활발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전주에서 8월 16일 배은희 목사를 비롯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전주부 임시 시국대책 위원회’가 발족됐다.

8월 20일에는 최홍열을 위원장으로 ‘좌우합작 건국준비위원회’ 전북지부가 조직됐다. 전주 이외 지역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각종 위원회 등 조직이 속속 등장했다.

군산과 이리(지금의 익산)의 경우, 조용관(趙容寬)이나 임종환(林宗桓)과 같은 인물이 해방공간의 초기 지역자치를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지역 내에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敵産)을 확보하고 치안유지 활동 등을 펼쳐나갔다. 대표적인 적산이 군산의 신흥동 일본식 가옥(일명 히로쓰 가옥)이다.

1930년대 후반 강제이주 이후 1945년 해방까지 세월을 만리타향에서 보내고 돌아온 전북인들은 그리워 했던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찾은 조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 관련기사
[전북도민일보] 1945년 해방, 조국으로 돌아오는 험난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