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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2.12.09] 갈등과 대립의 동북아, 서로를 이해할 방법은 없을까?
[2022.12.09] 갈등과 대립의 동북아, 서로를 이해할 방법은 없을까?
한중관계연구원2022-12-09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소련 시절 공공외교 VOKS와 동북아

 

세계화와 함께 공공외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조지프 나이가 규정한 소프트 파워가 현대의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소프트 파워는 국제 관계에서 전통적 권력 투사 수단인 ‘하드 파워’를 대표하는 군사력과 경제력 외에도 이전 국제 정치에서는 주요 수단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매력’, ‘설득’, ‘이끌림’ 등과 같은 요소들을 국제 정치에서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

 

BTS나 봉준호의 영화는 소프트 파워의 좋은 예이고 이는 문화적 영향력 외에도 정치적 영향력까지 파급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BTS를 만난 것이 좋은 예다. 일반적인 문화 전파와 달리 소프트 파워는 정치적 의미와 국가적, 외교적 의도가 더해진다.

 

조지프 나이가 소프트 파워의 개념을 정의하였지만, 동북아시아에서 소프트 파워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1925년 소련은 VOKS(전러시아 해외 문화 교류 협회)라는 기관을 설립하여 공공 문화 외교를 기획한다.

 

VOKS의 설립자는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트로츠키의 누이 올가 카메네바였다. VOKS는 1958년까지 유지되었고, 이후 바뀐 이름인 SSOD(외국과의 문화 교류와 우호를 위한 소련 사회 연맹)로 1991년까지 소련의 공공외교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VOKS의 전신은 192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에게 대외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설립한 민간 외교 기구들이었으나 러시아 내전이 끝난 뒤 카메네바는 20년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소련의 문학과 미술, 연극, 영화의 성과를 통해 소련의 이념적, 사회적 우월성을 전파하기 위해 VOKS를 설립하였다.

 

VOKS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VOKS 뉴스>라는 잡지도 발행했고, 여기서 활동한 이는 소련의 혁명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노벨상 수상자 미하일 숄로호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테인 등이 있으며, 심지어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나 프랑스 작가 로망 롤란도 VOKS 활동에 협력했다.

 

50년 이후의 VOKS는 여행 프로그램, 민간 축제 교류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는데, 1989년 임수경이 참가한 세계청년학생축전 역시 유사한 소프트 파워 행사이다.

 

VOKS의 초기 활동 중 러시아 지식인의 동아시아 방문이 주목할 만한데, 소련의 작가 보리스 필냑과 그의 아내 올가 쉐르비노프스카야가 동아시아를 방문했다. 당시 필냑은 소련의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쉐르비노프스카야는 러시아 연극의 심장부 말리 극장의 전속 여배우였다. 1926년 초 이 둘은 하얼빈에서 한반도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향했고, 같은 해 3월에서 5월까지 일본을 여행한 뒤 묵던(선양), 베이징, 상하이, 우한 등지를 순회하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해외 문화에 관심이 높았던 일본 사회에서는 혁명의 나라에서 온 작가를 열렬히 환영하여 신문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매일같이 보도했지만, 중국의 경우 소련 지식인의 방중 자체가 사회적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중국 군벌들 간의 전쟁과 서구 열강의 유린으로 중국 사회가 해외의 문화와 사상에 관심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VOKS나 소련의 지식인들은 프롤레타리아 문화와 10월 혁명의 정신을 전파하길 원했으나 필냑은 말 그대로 문화교류만 하고 돌아왔고(해외에서 인기있었던 초기 VOKS 활동가 대부분은 비프롤레타리아 계열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었다), 이듬해인 1927년에 자신이 주인공인 일본과 중국에 관한 소설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리고 이 두 편의 소설 역시 정치적, 외교적 의도가 없는 순수한 문화 탐구와 시대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글이었다.

 

이에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지식계는 필냑의 글을 식민지 문학의 ‘이국 취향’으로 정의하면서 필냑을 구시대적 부르주아 소설가로 비난하였다. 이 식민지 문학의 ‘이국 취향’은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 사례로 꼽는 서양의 동양 인식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VOKS나 프롤레타리아 지식인들이 필냑에게 요구한 아시아에 대한 올바른 인식도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이었다. 이들은 미개하고 봉건적인 아시아에 10월 혁명을 가능하게 한 이성주의와 유물론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필냑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작가들 앞에서 문학은 모든 민중에게 속하는 것이여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특별한 문학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이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레드 오리엔탈리즘’을 거부한 필냑이 쓴 소설 <일본 태양의 근원>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보다 20년 앞서 일본 문화를 통해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소설이었다. 필냑은 <일본 태양의 근원>이 출판된 지 10년 뒤 일본을 위한 스파이 행위로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이렇게 1920년대를 대표하는 소련 작가 중 한 명이었던 필냑은 오랫동안 러시아 문학사와 지성사에서 사라졌다.

 

▲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왼쪽부터, 타미지 나이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세르게이 에이젠쉬테인, 올가 트레티야코바, 릴리야 브릭,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아르세니 보즈네센스키, 일본 통역자. ⓒ루스키 돔 트위터 갈무리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말 그대로 동양 밖에서 동양을 인식하는 거의 모든 행위를 포괄한다. 서양인과 러시아인의 관점에서 동양은 항상 타자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시아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중국, 일본은 서로에게 타자이다. 그래서 어느 경우라도 자신의 시선은 필요하다.

 

소련의 마르크시스트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오히려 자신을 왜곡하게 된다. 그래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실천이 아니라 인식을 위한 사유이다. 즉, 자신이 자신의 관점으로 타인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는 것을 경계하고 되돌아보기 위한 사유이다.

 

VOKS와 필냑의 소설 <일본 태양의 근원>, 그리고 이 소설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의 반응은 20세기 세계화 시대의 공공외교, 소프트 파워의 본질과 지향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필냑이 일본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시대를 앞서는 것이었다.

 

그의 시선은 지질학자나 탐험가의 그것처럼 실재를 포착하려는 목적만이 있었고, 문화적 외양 속에 숨겨져 있는 일본 국가와 일본인의 근원을 파악하려 하였다. 일본과 중국 여행 이전 필냑의 소설은 ‘유럽’과 ‘아시아’를 상징하는 모티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대표작 <헐벗은 해>(1920)는 러시아 혁명을 유럽의 힘과 아시아의 힘이 충돌하는 현상으로 묘사했고, 연이은 그의 소설 <꽃며느리밥풀속>(1922), <기계와 늑대>(1924)에서도 유럽과 아시아의 상징이 뒤섞인 러시아가 묘사된다.

 

하지만 1926년 일본 방문 이후 필냑은 더 이상 아시아를 표상화해서 상상하는 것을 그만둔다. 러시아의 문예이론가 바흐친은 타문화를 대하는 자세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어떤 문화는 오직 다른 문화의 시선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온전하고 깊이 있게 드러낸다. 우리는 다른 문화에서 그 자신은 제기하지 못할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 다른 문화에서 우리가 던진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그러면 다른 문화는 우리 앞에 자신의 새로운 측면들과 의미적 깊이를 드러내면서 응답하는 것이다.

 

두 문화가 그렇게 대화적으로 마주하게 될 때, 두 문화는 합쳐지거나 뒤섞이지 않으면서, 각자가 자신의 통일성과 열린 총체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서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실천적으로 재인식하게 했던 필냑의 일본 인식과 문화를 통한 바흐친의 ‘대화적 이해’는 오늘날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첫 번째 원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