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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3.05.12] 2023년의 한국과 동북아는 독립운동가를 기념할 수 있나
[2023.05.12] 2023년의 한국과 동북아는 독립운동가를 기념할 수 있나
한중관계연구원2023-05-12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중국 광저우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운동가, 김근제와 안태

 

중국 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일명 황포군관학교)

 

코로나 팬데믹의 맹위도 어느 정도 잡힌 것 같다. 팬데믹으로 중국지역 한국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단의 활동이 중지된 지도 3년이 넘었다. 또한 동북아의 국제정세로 인해 한중관계 역시 코로나 팬데믹 이전 시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1992년 8월 한중수교 이후 한국과 중국은 경제적 파트너를 넘어 동북아 평화의 동반자임을 강조해 왔지만 최근에는 그러한 상황이 조금도 진전되고 있지 않은 분위기이다.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은 수천년간 좋든 싫든 이웃으로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친 존재였다.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에 가장 고초를 함께 겪었던 역사적 경험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 가운데 황포군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1924년 6월 6일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인 황포군관학교는 소련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설립되었다. 정식 명칭은 중국 국민당 육군 군관학교이지만 주강(朱江)의 황포 장주도에 위치해서 일반적으로 황포군관학교로 불렸다.

 

장제스(蔣介石)가 황포군관학교에서 피압박 민족을 후원하여 한인 학생을 급비생으로 대우하자 입학 지망생이 증가했다. 한인들은 신식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서 중국의 새로운 정치와 군사를 배우고자 운집했다.

 

입학기는 8개월 주기였는데 학교 당국과 협의해서 한인에 한해서는 임시로 입오생(예비생) 입학을 허락했다. 그후 수용인원이 초과하자 별도로 학생군이라는 명칭으로 각지에 산재한 병영에 수용시켜 수비에 근무하고 동시에 군사정치를 교육했다.

 

제4기에는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간부들이 대거 입학하였다. 황포군관학교 학생명단에서 확인된 한인 인원만 73명이었다. 우한(武漢) 분교를 비롯한 여러 분교에 재학 중인 한인 청년들까지 합하면 200명이 넘는 숫자이다.

 

이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조선혁명군사 정치 간부학교를 통한 군사간부 양성에 힘썼으며,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적 기초를 닦으며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나아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은 1940년 한국광복군 설립에 필요한 인적 자원의 토대가 되었다.

 

▲ 1920년대 촬영된 황포군관학교 정문 전경.

 

중국 혁명 전쟁에 동원된 김근제와 안태

 

코로나 19가 발생하기 전 어느 날 새벽 6시 중산(中山)대학에서 운영하는 호텔을 나와 주강(朱江)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를 달렸다. 광저우의 가로수는 수염나무다. 정확한 나무이름은 모르겠지만 나무들이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것 같아 붙인 이름이다.

 

중산대학에서 황포군관학교까지의 거리는 차로 약 30여분이 소요된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에 차가 별로 없다. 자동차가 9시 5분경 쟝하이대도(江海大道)를 달린다. 왼쪽에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의 주 건물이 웅장하게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차는 광저우대학성(廣州大學城) 이정표를 지나고 있다. 독일제 아우디 차가 우리 일행을 태운 차를 아주 위험하게 추월해서 쏜살같이 도망친다. 차 속도보다 빠른 것이 인간의 시간 아니겠는가. 오늘 답사 대상지는 황포군관학교 출신 한인 청년들의 묘였다. 이 묘는 지금은 퇴직한 광저우 한국총영사관에서 근무하였던 강정애 박사의 열정으로 찾게 된 것이다. 빠르게 지나온 역사의 끈을 찾아야 되지 않을까. 그 역사에 동참한 강박사에게 우문을 던졌다.

 

“강박사님 언제 발견했죠”

 

“2010년 4월 경에 발견한 것 같아요. 사진을 보면 더 정확하구요”

 

이 두 분의 묘비는 강정애 박사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2010년 말 광저우 중산대학을 방문한 한상도 교수는 이곳을 찾은 후 두 분 묘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황포군관학교에 남겨진 김근제와 안태 두 분처럼, 수백명의 한인청년들이 무엇을 하러 황포도에까지 왔을까. 이제 우리가 그들의 열정과 고뇌를 되짚어 보아야 할 차례이다.”

 

광주대학청과 황포군관학교 안내판을 따라 차는 빠르게 내려간다. 강정애 박사는 이곳 대학성의 이야기를 잠시 들려준다. 광주시내 16개 대학의 분교를 설립한 것이라 한다. 예전의 농촌이 지금은 배움과 열정이 가득 찬 대학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넓은 대학성을 조성하는 데 1년 정도 소요되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의 위력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돌격형 정책이 빚은 결과이기도 한 것 같다. 하와이의 이국적인 모습이 대학성 전체를 감싸고 있다. 대학성을 빠져 나와 10분 정도 달리자 동정진망열사기념관(東征陣忘烈士紀念館)의 거대한 기념문이 일행을 맞이한다.

 

입구를 지나 100미터 올라가자 왼쪽으로 동정열사기념관이 눈에 띤다. 그곳을 지나쳐서 바로 김근제 지사와 안태 지사가 누워 있는 묘역으로 향했다. 강정애 박사는 이곳이 예전에는 야오중카이(廖仲愷) 공원이었다고 한다. 언제 바뀌었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어찌되었건 이곳에 두 지사가 누워 있다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다.

 

마침내 동정열사묘역에 도착했다. 황포학생묘군에는 모두 6줄에 66개의 묘비가 있는데 김근제의 비석은 3째 줄 좌측 4번째에 위치하고, 안태의 비석은 4째 줄 좌측 3번째에 자리 잡고 있다. 김근제의 묘비 전면에는 한가운데에 내려쓰기로 ‘한국인(韓國人) 김근제지묘(金瑾濟之墓)’오른쪽에는 제2학생(金瑾濟二學生) ○ ○ ○ ‘가 새겨져 있다.

 

안태의 비석 역시 내려쓰기로 한가운데에 ‘안태동지(安台同志)’4자가 보이고, ‘동지’자와 같은 높이의 오른쪽 옆에 ‘심춘(沈春)’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오른쪽에는 ‘한국괴산(韓國槐山)’이, 비석 왼쪽에는 ‘민국16년 11월 9일(民國十六年十一月九日)’이라고 쓰여 있다. 그 중 심춘은 아명이나 아호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았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김근제는 1904년생이며 본적지는 평북 정주군 안흥면 안의동 395번지이다. 오산학교에 다니다가 만주로 건너갔다고 전해지는데 김근제는 집안 형제인 김은제와 함께 황포군관학교 6기생으로 입학했다.

 

충북 괴산 출신인 안태 역시 6기생이며 김근제와 안태는 <황포군관학교 동학록> ‘사망동학’ 명단에 있지만 신상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없다. 이들은 당시 중국대륙을 항일투쟁의 근거로 삼아 한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김근제와 안태의 묘비는 황포 동정진망열사묘원 내 황포군교학생묘역에 있다. 동정진망열사묘원은 1925년 9월 광저우 동강(東江)지역을 세력권으로 하는 천종밍(陳炯明)이 광저우를 공격하자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을 주축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희생당한 학생들의 묘역이다.

 

동정진망열사묘원은 1928년 장제스의 특별지시로 조성되었다. 희생된 학생들은 장주도(長州島) 만송령(萬松嶺) 여기저기 매장되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는데 1984년 황포군교학생묘원을 조성하고 기념비석을 세웠다.

 

이곳 황포군교학생묘원은 황포군관학교기념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황포군교와 약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서 일반인이 찾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강정애 박사가 발견하고 이를 알리는 데 광저우한국총영사관도 한몫 하고 있었다. 민관이 한 마음으로 잊혀 진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발굴 보존하는 데 힘쓰고 있으며, 특히 중국 측의 관심도 상당히 높아졌다.

 

다만 최근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반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젊은이들의 희생을 기념할 만큼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함께 고통을 겪었던 시대를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희생된 젊은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