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3.08.18]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2023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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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3-08-18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광복 78주년 발해를 꿈꾼 독립운동가들이신욱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 HK+ 연구교수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발해를 꿈꾸며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2시간 반에 만나는 유럽으로 불리며 2018년과 2019년 한해 20만이 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던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는 시베리아 철도의 종착지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시다.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는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방될 때까지 소련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었던 중요 군사도시였으며 한국과의 지리적 인접성과 함께 고려인들의 고향과 강제이주 그리고 발해로도 잘 알려졌고, 특히 한러수교 120주년이자 한인 정착 140주년 기념 서태지의 블라디보스토크 공연(2004.05)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러시아에 대한 본격적인 한류 상륙작전은 당시 빅토르 최의 사망으로 목마른 러시아 록 팬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서태지와아이들의 노래처럼 발해를 꿈꾸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독립운동의 허브 신한촌
역사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가 안중근 의사와 관계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구한말 조선과 만주에서 이동한 대한독립군단의 정착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고 을사늑약과 한일 강제병합 이후 1910년대 조선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신한촌이 형성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단순한 독립군의 집결지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허브’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 밖의 국외 독립운동의 기지로서 신한촌은 러시아 영토 내의 한인 자치기구 성격을 가졌고 그 중심에 고려인들이 있었다.
최재형, 최봉준, 문창범, 김학만 등 고려인 지도자들은 무기구입, 독립자금 모금 등을 통해 이범윤, 홍범도 등 만주에서 투쟁하는 조선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지원했고 헤이그 특사인 이상설, 이위종 선생과 국내에서 신민회를 조직·활동했던 안창호 선생, 민족주의 교육을 중시한 이동녕, 정순만 선생과 미주 공립협회와 국민회를 조직·활동했던 정재관, 이강 선생, 민족사학자 박은식, 신채호 선생, 기독교계 이동휘, 대종교 백순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모였던 곳이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 최재형 선생과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도 이곳 신한촌에서 출발했고 안중근 의사 의거의 중심에 최재형 선생이 있었다. 1907년 연해주 의병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된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최대 후원자는 러시아의 갑부 최재형 선생이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권총에서부터 태극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도 최재형 선생의 집에서 행해졌고 이토 히로부미 사살 이후 벌어질 법정에서 변호사 섭외에도 최재형 선생이 있었다. 러시아 극동 최대 군수업자였던 최재형 선생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신한촌과 항일의병부대를 지원했고 연해주와 만주 무장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대한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해야 할 분이다.
백년만의 해후와 독립운동
일제에게는 눈엣가시 같았던 독립운동의 중심지 신한촌은 1920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4월 참변)으로 인해 사라졌고 일본군의 학살에 안타깝게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고려인 동포들이 희생되고 최재형 선생 또한 항거하다 살해되어 그 유해를 찾을 길이 없다.
지난 14일 국립현충원에서는 국가보훈부 주최 ‘백년만의 해후’라는 행사가 있었다. 고 최재형 선생과 그의 부인 최 엘레나 여사의 부부합장식 이었다. 1938년 키르기스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최 엘레나 여사와 최재형 선생 사망 추정지의 흙을 함께 모셨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라는 국가보훈부 장관의 추모사는 후손으로서 대한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동양 평화론과 공생체 구상
뤼순 감옥에서 저술한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은 21세기 여전히 냉전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안중근과 최재형의 시대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 대표적인 제국주의 시대였고 일본 제국주의는 러일전쟁에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조선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거짓 명분을 통해 조선을 침탈했다. 청년 안중근과 최재형 선생은 이를 방관할 수 없었고 동양 제국주의의 선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상호 신뢰와 공동번영이 필요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군대 파병, 전쟁과 학살, 인권유린으로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끝내는 파시즘에 대항한 미국과 대한 광복군 등 자유민주 진영의 저항에 무너졌다.
만약 일제가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을 받아들이고 동북아 공생 시대로 나아갔다면 일제의 패망과 함께 벌어진 한반도 분단과 전쟁이 없었을 것이고 북핵으로 위협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 각국은 ‘동양평화’ 유지와 ‘대한독립’ 정신으로 표방되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상호 공생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전쟁과 파괴, 미움에서 벗어나 진정한 화해와 화합 그리고 공생의 시대로 나아가야만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진정한 선진시대로 발전할 것이다. 광복 78주년을 맞아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 발렌틴 선생을 기억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