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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3.12.29] 엑스포 유치, ‘지역 발전’을 넘어서는 인식 전환이 먼저
[2023.12.29] 엑스포 유치, ‘지역 발전’을 넘어서는 인식 전환이 먼저
한중관계연구원2023-12-29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한국과 중국의 세계엑스포 유치와 개최 이야기

 

2030년 부산엑스포 유치는 한낱 꿈이었는가?

 

대한민국 부산은 2023년 11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총회(BIE) 1차 투표에서 165개 회원국으로부터 겨우 29표를 얻었다. 경쟁해볼 만한 상대라고 자신했던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는 119표를 얻어 2030년 세계 엑스포 개최지로 선정됐다.

 

이 결과에 대해 국내 언론은 연일 정부의 안일했던 유치 작전을 문제 삼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쓰디쓴 결과였지만, 역시 현실 세계는 냉혹했다.

 

19세기는 ‘박람회의 세기’라고도 불렸으며, 제1회 엑스포는 1851년 영국에서 개최됐다. 산업 혁명 이후 각국의 공동체 심화 현상이 강화된 서구 열강은 자신들의 문화와 문명을 전시함으로써 다른 대륙과의 현저한 차별화를 주장했고, 이를 통해 자국의 국력을 과시하면서 제국주의의 속성도 교묘하게 포장했다. 또한 상품 시장 확보를 위한 서구 열강의 강력한 군사적 위협은 아시아의 개항과 개방으로 연결됐다.

 

조선 말기 고종은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도쿄에서 개최된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를 참관시켰는데, 이것이 한국사에서 최초의 박람회 관람이었다. 그 뒤 1893년 시카고 세계 엑스포와 1900년 파리 세계 엑스포에 참가했다. 당시 정부는 엑스포를 근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주요한 계기라고 인식한 것이다.

 

▲28일 오후 부산 동구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린 2030부산세계박람회 성공유치 시민 응원전에서 시민들이 엑스포 유치를 기원하며 응원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물산공진회, 제국 일본은 선전하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제국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에서 강력한 식민통치를 단행했고, 5년 뒤에는 ‘시정 5주년’ 기념으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오늘날의 작은 박람회 성격이었는데, 제국 일본이 대한제국 강점을 축하하고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성이 강한 행사였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개최되었던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를 통해서 ‘조선 산업의 진보 발달을 보이고 조선의 산업을 소개하고 이후 개량 진보를 장려한다’라는 개최 목적을 널리 선전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제국주의 선전의 공간이자, 식민지 소비자를 유혹하는 상품 세계로의 호객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의 지배 논리와 정치 선전을 여실하게 담아내며, 근대 문명의 위광으로써 일반인의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연출했다.

 

특히 관람객 유치에 공을 들였는데 이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제의 식민 통치 성과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조선의 산업 개발과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조선 산물의 판매 및 여타의 방법을 도모하여 제국 일본의 국익을 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관람객들이 ‘깜짝 놀랄만한’ 전시회와 함께 압도적인 관람객 동원이 절실했다. 관람객이 많을수록 ‘시정 5주년’의 성과가 돋보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의 교통로와 서울의 도로를 개보수했다.

 

조선총독부는 지방에서 경성에 이르는 철도와 도로 등 교통시설의 정비, 경성 내에서 조선물산공진회장인 경복궁에 이르는 도로의 개수와 정비, 관광객들의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숙박 시설과 식당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예산이 문제였는데, 조선총독부는 부족한 예산을 메우기 위해 제국의회 예산을 요구했다.

 

1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이민족에 의해 개최된 ‘작은 박람회’는 구성원들의 일상 생활도 변화시켰다. 그 가운데 관람객 유치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었던 교통로의 대대적인 개보수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선물산공진회의 정문은 광화문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기 전이었다. 조선의 정궁이었던 광화문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군중들을 받아들였다. 특히 야간에는 광화문에 크리스마스 조명 같은 전등을 설치하여 관람객들에게 ‘별세계’를 제공하기도 했다. 조선물산공진회의 총 관람객은 116만여 명이었다. “관람객 유치와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구호는 이미 100여 년 전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정책이었다.

 

중국 상하이 엑스포의 오늘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두 차례 엑스포가 개최되었다. 1993년 대전 엑스포와 2012년 여수 엑스포 였는데, 이는 모두 인정 엑스포였다. BIE가 공인하는 엑스포만이 국가관을 설치할 수 있으며 정부가 주최하고 참가국을 초청할 수 있는데, 공인 엑스포는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등록 엑스포와 그 사이에 한 번 열리는 인정 엑스포로 구분된다. 부산 엑스포 유치는 등록 엑스포를 개최하기 위함이었다.

 

2010년 중국 상하이에서는 BIE가 공인하는 등록 엑스포가 개최됐다. 2002년 대한민국 여수와 4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상하이가 엑스포 도시로 결정됐다. 엑스포의 주제, 개막일과 기간, 장소, 면적, 예상 관람객, 재정 능력, 참가국에 대한 보장 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심사 기준을 통과하여 상하이가 개발도상국의 도시로는 처음으로 등록 엑스포를 유치하게 된 것이다.

 

상하이 엑스포도 순탄하지 않았다. 선정 다음 해 봄에 SARS(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가 중국 전역을 강타하면서 차질이 빚어져 그 해 10월이 되어서야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그 다음의 난관은 부지 물색이었는데, 약 2만 가구가 철거 대상이었다. 중국 정부는 철거민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면서 ‘성숙한 시민’ 의식을 강조하는 캠페인까지 벌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세계 3대 행사 중 올림픽과 엑스포를 2년 간격으로 개최하게 된 중국은 개혁 개방의 성과를 자국민뿐만 아니라 온 세계인에게도 과시하고 싶어했다. 개막식 때 주변국 정상과 세계 지도자들을 초청한 중국은 관람객 수에 민감했는데. 국제 행사의 경험 미숙과 교통 및 숙박 시설 부족 등으로 1일 관람객 목표 기대치 30만 명에 크게 못 미치는 10만 명 정도의 방문객들이 엑스포장을 찾았다.

 

하지만 여름철부터 수많은 관람객들이 꾸준히 찾아들어 상하이 엑스포는 관람객 유치 면에서는 성공한 행사로 평가됐다. 이 때 ‘한국관’은 70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상하이 엑스포의 투자 비용은 한화 5조 원 이었지만 경제적 효과는 약 70조 원을 상회했다. 부산 엑스포가 기대했던 경제 효과가 60조 원을 상회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 엑스포 개최는 확실하게 ‘남는’ 장사이기는 하다.

 

우리의 미래는?

 

2025년에는 일본 오사카-간사이 세계 엑스포가 개최될 예정이다. 이웃 나라에서 개최되는 세계 엑스포를 그저 부러운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과연 세계 엑스포가 진정 자국민의 경제력 향상과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평화 공생할 수 있는 아젠다를 지녔는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탐욕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탐욕으로 지구는 또 다른 위기에 빠져 있다. 기후, 식량, 전염병, 양극화, 전쟁 등의 심각한 위기는 향후 인류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거대한 문제이다. 따라서 세계 엑스포를 개최하는 것이 단순히 그 지역의 발전과 이익을 넘어 서서 지구적 공생과 평화 연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인식의 확산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