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5.10.14] 용을 통해 알아본 중국 문화와 토템이즘
[2015.10.14] 용을 통해 알아본 중국 문화와 토템이즘
한중관계연구원2021-01-22

황제의 상징으로 활용, 생활과 풍습에 많은 영향 끼쳐

 

 

중국 = ‘龍’

 

‘잠에서 깬 노룡(老龍)’, ‘비상하는 거룡(巨龍)’이라는 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을 떠올린다. 이처럼 중국과 용, 이 두 단어의 자연스러운 조합이 어색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도 흔치 않을 것이다. 중국의 각종 행사나 기념식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중국을 나타낼 때에도 많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용의 계승자(龍的傳人)’라고 칭할 정도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중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지 오래인 용, 대체 어떻게 생겨난 걸까?

 

 

 용의 탄생과 황제(黃帝)

 

띠를 나타내는 12개의 동물 중 오직 용만은 실존하지 않는 전설의 동물이다. 물론 요즘엔 고고학적 발견으로 용이 수억 년 전 트라이아스기에 물과 땅 양쪽에서 다 살 수 있었던 파충류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기에서 딱딱한 학술 얘기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용의 기원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상고시대 중국인들이 미지의 자연현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연을 숭상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여긴다. 세계 각지의 많은 민족들이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을 신성시했던 것을 ‘토템(Totem)’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대 중국인들 역시 용을 그들의 토템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럼 용이 대체 어떻게 중국인들에게 토템이 되었고, 현재까지 중국인들을 하나로 묶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중국 신화세계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한 명인 황제(黃帝)에게서 찾을 수 있다.

 

황제는 한족의 기원인 화하민족의 선조로 일컬어진다. 하족의 지도자였던 황제는 동쪽으로 진출하며, 염제(삼황오제 중 하나)가 이끄는 화족을 통합하였다.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중 동방의 구려족을 이끌던 치우와 탁록에서 충돌하였다. 당시 중원의 명운을 가르는 이 대전은 결국 황제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황제에 의해 중원의 각 부족들은 하나로 통일이 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황제가 통일했던 중원의 부족들은 3개의 대부족과 72개의 소부족이었다고 한다. 서로를 적대하던 이 많은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위해 황제는 여러 정책을 활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현재 중국의 용이라고 한다.

 

황제는 자신의 원래 부족인 하의 토템인 뱀을 기초로 각 부족들의 토템을 융합하여 새로운 형상, 즉 ‘용(龍, Loong)’을 창조해냈던 것이다. 이로써 중원의 모든 부족들을 하나로 묶었고, 또한 용을 황제 자신의 상징으로도 활용하였다. 이후 중국의 여러 부족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 시작하였고, ‘중국’이라는 정체성(正體性)을 가지기 시작하며, 용을 신성시하였다. 이 결과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은 자신을 ‘염제와 황제의 후손(炎黃之孫)’이라고 부르며, 앞서 황제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기 위해 만든 용을 자신들의 유일한 토템으로 받아들이며 ‘용의 계승자(龍的傳人)’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염제와 황제의 후손’, ‘용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중국인’은 한족만을 뜻하며, 중국내 소수민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족이 중국 인구의 절대다수인 90% 이상을 차지하다보니, 일반적으로 이렇게 한족들의 것이 모든 중국 민족들의 것을 대표하는 듯한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이는 엄격히 말하면 소수민족들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대단히 잘못되고 위험한 생각이다. 이러한 중국내 한족과 소수민족의 복잡한 관계는 이후에 서술하도록 하겠다.

 

중국의 용(龍) 문화

 

이렇게 탄생한 용은 고대 중국의 많은 문서에서 등장한다. 이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중국 최초의 자전(字典)으로 여겨지는 동한(東漢) 허신(許愼, 58(?)-147(?))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있는 용에 대한 설명이다.

 

용은 인충(鱗蟲, 고대 중국인들은 동물의 종류가 5가지라고 여겼으며, 인충은 비늘을 가진 동물을 가리킴)의 장(長)으로, 사라지거나 나타날 수 있고, 얇아지거나 두꺼워질 수 있으며, 짧아지거나 길어질 수 있다. 춘분(春分)에 하늘에 오르고, 추분(秋分)에 깊은 못에 들어간다.

 

자전인 『설문해자』의 이와 같은 기록은 한대(漢代) 사람들이 이미 용이 실존하는 동물이라고 여겼고, 그에 대한 인식이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졌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후대로 갈수록 용은 더욱더 진화하며 더욱 구체적으로 나뉘게 된다. 비늘이 있는 용은 교룡(蛟龍), 날개가 있는 것은 응룡(應龍), 뿔이 있는 것은 규룡( 龍), 뿔이 없는 것은 이룡( 龍), 승천하지 못한 것은 반룡(蟠龍) 등등 용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구분이 생겨난다.

 

그럼 대체 용은 어떻게 생겼을까? 앞에서 황제는 각 부족들의 토템을 하나로 융합하여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신수(神獸)인 용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존재하지 않던 용의 모습은 추상적인 형태로 굳어져 ‘구사(九似, 아홉 가지의 모습을 닮았다)’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송대 나원(羅願, 1136-1184)의 『이아익(爾雅翼)』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용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다.

 

뿔은 사슴, 머리는 낙타, 눈은 토끼, 목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물고기, 발톱은 매, 발바닥은 호랑이, 귀는 소와 같다.

 

용이 중국의 문화에 남긴 흔적은 셀 수 없이 많다. 더욱이 비바람을 몰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등 신통함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고, 앞서 황제(皇帝)가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상징으로 활용하였던 원인 등으로 용은 상서(祥瑞)로운 존재로 자리 잡았다. 용은 황제(皇帝), 즉 천자(天子)의 신성함을 나타내, 황제의 얼굴은 용안(龍顔), 황제의 자리는 용좌(龍座), 황제의 옷은 용포(龍袍) 등으로 표현하였다.

 

용은 황제의 권위뿐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신성시 여겨져 많은 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먼저 중국 지명에서 용이 들어가는 것만도 수천 개가 존재한다고 한다. 용과 관련 있는 중국의 전통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매년 원소절(原宵節, 음력 1월 15일 정월대보름)에 반드시 빠지지 않는 행사로 용 모형을 들고 여러 명이 춤을 추는 ‘무룡등(舞龍燈)’이 있다. 또 음력 2월 2일은 용이 고개를 든다는 ‘용대두(龍頭)’인데, 이는 비바람을 관장하는 용에게 비를 바라며, 한 해의 풍년을 비는 날로, 이때 꼭 먹어야 하는 것이 용의 수염과 같이 가느다란 ‘용수면(龍鬚麵)’이다. 단오에도 가장 중요한 행사로 용주(龍舟)라는 배를 타고 서로 시합하는 ‘새룡주(賽龍舟)’가 있다.

 

이렇게 용은 중국인들의 생활과 풍습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심지어는 나라를 상징하는 데에까지 쓰인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국기(國旗)’라는 것이 없었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 열강들이 침략과 함께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면서 청 말기에 최초로 국기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이때 용으로 중국의 정체성, 상징성 등을 나타내었다. 황룡기(黃龍旗)로 명명된 이 국기는 1888년부터 1912년 청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처럼 용은 수천 년간 중국 역사의 대하(大河) 속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숨쉬어 오며, 그들에게 ‘中國’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하였다. 또한 ‘龍’이라는 문화는 이들의 삶의 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쳐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앞으로도 용은 중국인들의 자랑스러운 문화로서 이들을 하나로 묶는 상징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임상훈 교수(한중관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