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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1] 중국의 번영을 실현한 덩샤오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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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2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중국 개혁개방의 총 설계자 덩샤오핑 서거 20주기를 기념하며
▲ 1979년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좌), 우측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 출처 : 위키백과
지난 2017년 2월 19일은 중국의 2세대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 1904~1997) 서거 20주기였다. 지난 2007년 10주기 기간 중에는 각종 기념행사와 학술회의가 크게 개최되었고, 보통 중국이 5주년, 10주년 단위 행사를 크게 치르는 것과는 달리 올해는 조용히 지나갔다. 심지어 주요 언론 매체도 추모 보도나 관련 기사가 적어, 그 배경과 의미에 오히려 관심이 쏠리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한 공부를 했다면, 덩샤오핑 혹은 등소평이란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2세대 핵심 지도자로, 중국은 그를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라 평가한다. 사실상 그는 개혁개방, 일국양제 등 우리가 아는 현재 중국의 정치, 외교, 경제, 사회 틀을 설계한 사람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덩샤오핑이 중국과 중국 인민의 삶에, 나아가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중국의 3세대 지도자 장쩌민은 “덩샤오핑 동지가 없었다면, 중국 인민들은 오늘과 같은 새로운 삶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 평가했다. 그리고 미국 타임지의 경우 1978년,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덩샤오핑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며, 그를 세계를 변화시킨 인물로서 그 공적은 역사상 전례가 없다고 평가했다.
사실, 덩샤오핑이 중국 정계 최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중국의 당대 암흑기로 불리는 문화대혁명(1966~1976)이 끝나 가던 시기였다. 중국은 10년 투쟁을 겪는 동안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었고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감히 혼란과 갈등을 책동하던 무리들을 제거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천명하며, 개혁개방을 강하게 밀어붙였던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1978년 이후 30여 년, 개혁개방 정책의 결과 현재 중국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 으로 성장했고, 미국과 함께 G2로 불리고 있다. 그간 중국의 GDP 비중은 세계 1%에서 12%까지 상승했으며, 일인당 GDP의 경우는 70달러 수준에서 8,250달러 수준까지 성장하였다. 그간 중국이 세계 경제 성장까지 견인하며, 많은 이들이 언제 미국을 넘어설지 그 시기를 전망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한 국가가 추구해야 할 두 가지 기본적 가치로 독립과 번영을 꼽을 수 있다. 중국의 1세대 지도자 마오쩌둥은 독립을, 그리고 2세대 지도자 덩샤오핑은 번영을 실현하였다. 뒤를 이은 3세대, 4세대 그리고 지금의 5세대 지도자 역시도 두 사람이 마련한 큰 틀 안에서 중국을 이끌어 왔고, 그 결과 현재 중국은 초강대국 미국과 마주 앉아 다양한 글로벌 이슈를 논의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덩샤오핑은 현재까지도 중국 인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로 칭송받고 있다. 물론 그가 주도한 1950년 티베트 점령, 1979년 중공-베트남 전쟁, 1989년 천안문 사태 등으로 그에 대해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그의 시험과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현재 정부의 정책 기조와 달라 향후 예전과 같은 환영을 받진 못할 것이란 의견도 존재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국가가 심각한 혼란에 빠졌던 시기에 덩샤오핑이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였고, 그로 인해 현재 중국의 국력과 중국 인민의 삶이 대폭 개선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중국의 빠른 성장이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와 세계 경제에 큰 기회와 축복이 되었단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이 사실만으로도 덩샤오핑 20주기는 충분히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임진희 (한중관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