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아시아 (원대신문)
[2017.11.21] 사라진 기회의 사다리, 늘어가는 상대적 박탈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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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2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중국의 ‘농민공(農民工)’
중국에서 ‘농민공(農民工)’이라는 말은 개혁개방이 시작된 1980년대 초부터 나타났다. 개혁개방으로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바로 오늘날 중국 경제를 성공적으로 일으켜 세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즉 농민공은 ‘농민(農民)이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工人)’라는 의미로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은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을 했지만 꿈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도시를 떠도는 농민공은 여전하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중국 전역에 분포된 농민공의 수는 2억 8천 171만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20%에 달하고 그들의 평균 월급은 3천 275위안(환화 약 56만 원)가량이다. 농민공의 도시 유입은 중국 도시지역의 노동력 부족, 특히 도시민이 기피하는 업종과 특정 직종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완화하는데 기여하였고, 기업의 노동비용을 낮추면서 국내외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처음 ‘농민공’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된 계기는 1989년 춘절(春節, 설날) 때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국 주요 기차역에 모여든 수백만 명의 농민공으로 기차 운행이 혼란을 겪으면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매년 춘절에 농민공의 귀성이 명절의 중요한 뉴스로 다루어지고 있다.
최근 중국은 시장경제의 급속한 확산과 시대 변화에 따라 농민공도 점차 분화되고 있다. 즉 농민공은 세대별로 ‘1세대 농민공’과 ‘신세대 농민공’으로 나뉜다. 농민공의 출생연대를 기준으로 1980년대 이전 출생자를 ‘1세대 농민공’으로, 그 이후 출생자를 ‘신세대 농민공’으로 칭하고 있다.
‘1세대 농민공’이라 불리는 초기 농민공은 도시에서 돈을 벌어 고향에 있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1세대 농민공은 1980년대 말이나 1990년대부터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고향의 부모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공장이나 건축현장 등에서 특별한 기술 없이 육체노동에 종사했으며 명절에만 고향을 찾는 기러기 생활이 일반적이었다. 도시에서 단기간 돈을 번 다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고, 도시 정착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80허우(八零后)’, ’90허우(九零后)’로 불리는 80, 90년대에 출생한 젊은 ‘신세대 농민공(新世代農民工)’의 생각은 1세대 농민공과는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갈 생각보다는 계속 도시에 남아 도시민으로 생활하기를 원한다. 이들 대부분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고, 부모를 따라 도시생활에 적응한 세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현재 약 1억 명으로 추산되는 신세대 농민공의 정체성은 이미 도시에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1세대 농민공, 신세대 농민공 모두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의 희생물로 전락하고 있다. 그동안 임금 착취와 체불, 사회보장에서 소외, 자녀교육문제 등 농민공의 처우는 중국 경제성장의 어두운 면으로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대부분의 농민공은 신분 아닌 신분인 ‘호구(戶口)’의 틀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농촌 호구를 가진 ‘흙수저’로서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은 경제적, 제도적 사회 장벽으로 기회의 사다리는 없어진지 이미 오래고 도시 주변인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어서 상대적 박탈감만 커지고 있다.
논어(論語)의 계씨편(季氏編)을 보면 “부족함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함을 걱정하라(不患寡而患不均)”는 공자의 말에서 오늘날 중국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 민낯 농민공을 생각하게 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2020년까지 ‘전면적 사오캉(小康: 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지만 많은 농민공은 여전히 법률·제도적 제한으로 도시민으로 편입하지 못하고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여 돌아갈 고향마저도 잃어가고 있다.
김준영 교수(한중관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