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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0] 중국도 역사 교과서 논쟁…근대사 어떻게 봐야 할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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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5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역사 되찾기인가 정치적 의도인가?
2017년 1월 3일, 중국 교육부가 전국 초·중·고 교과서에서 중국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항일전쟁의 역사를 ‘8년 항일전쟁(八年抗战)’에서 ’14년 항일전쟁(十四年抗战)’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는 문건이 나왔다.
해당 문건은 ’14년 항일전쟁’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각급, 각종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고, 2017년 봄 학기부터 중국 전역에서 전면 시행하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교육부 인사의 확인을 통해 이 문건이 사실로 밝혀지자 중국 전역에 항일 전쟁과 관련 역사에 대한 논의와 재평가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중국 항일전쟁의 시작, 1937년? 1931년?
중국 관련 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항일전쟁 기간이 8년인가 아니면 14년인가’라는 논쟁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일찍이 1980년대부터 ’14년 항일전쟁’ 개념을 주장하였고, 2005년 무렵부터는 이러한 주장이 학계의 인정을 폭넓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05년 9월 3일, 후진타오(胡錦濤) 전 총서기는 중국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즘 전쟁 승리 60주년 기념 대회에서 “1931년 9·18 사변은 중국 항일전쟁 기점이며, 중국 인민의 끈질긴 국지전이 세계 반파시즘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중국인들은 7·7 사변을 계기로 중국 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교육받았고 또 그렇게 믿어 왔었다. 7·7 사변이란 1937년 7월 7일 베이징 루거우차오(卢沟桥) 부근에서 훈련 중이던 일본군이 한밤의 총성과 한 사병의 실종을 핑계로 관련 지역의 진입과 수색을 요구했는데 중국군이 이를 거절하자 8일 새벽 공격, 점령한 사건을 일컫는다. 사실상 중국의 항일 전쟁이 이를 계기로 전면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8년 항일전쟁(八年抗战)’ 개념은 오랫동안 보통의 중국인에게 사고와 언어의 기저가 되었던 습관이자 상식이었다.
위의 교과서 개정은 중국 항일전쟁 기점을 7·7 사변(卢沟桥事变)에서 1931년 9월 18일 발생한 9·18 사변(奉天事变 혹은 柳条湖事件)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이는 9·18 사변이 중국 랴오닝성 션양 류타오후(辽宁省 沈阳 柳条湖) 부근에서 발생한 국지적 사건이나, 일본이 사실상 이 사건을 시작으로 중국 침략을 노골화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그대로 적용하면 중국의 항일전쟁 기간은 총 8년(1937년~1945년)에서 14년(1931년~1945년)으로, 7·7 사변은 기존의 항일역사 기점에서 전면적인 확대 기점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된다.
되찾은 역사? 정치적 의도?
이번 교과서 개정에 대한 중국 학계와 언론의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이다. 첫째로, 잃어버린 역사와 명예를 되찾게 될 것이란 주장이다. 그간 간과되었던 동북 항일전쟁의 역사와 존중받아 마땅한 항일전 영웅들이 새로운 교과서로 인하여 다시금 조명 받게 될 것이란 설명이다.
이들에 따르면 동북 지역은 사실 ’14년 항일전쟁’ 기간에 가장 심한 고통을 겪었던 지역이며, 수많은 홍군과 의용군 영웅이 일본 침략을 막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쳤던 치열한 전장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관심과 조명이 없다면 이는 온전한 역사가 아니란 것이다.
둘째로, 국내외로 팽배한 역사 허무주의에, 그리고 침략의 역사를 부인 혹은 미화하려는 일본 우익세력에 보다 강력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들에 따르면 근래에 일부 세력들이 인터넷을 이용해 역사 허무주의를 확산시키고, 항일전쟁 영웅이나 항일 과정에서 버팀목과 같았던 중국 공산당의 역할을 폄하하려 시도한다. 심지어 일본 우익 세력은 일본의 중국 침략 사실(史實) 자체를 부정하고, 그 죄악을 미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번 개정을 통해 이러한 무리에 강력히 대응하고, 국민들의 항일과 애국정신을 고취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과 냉소적 반응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타이완의 중국 근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정치대학 역사학과 류웨이카이(劉維開) 교수는 “중국의 이번 조치는 항일전쟁 역사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고, ’14년 항일전쟁’ 주장은 중공이 항전의 과정에 버팀목 같았던 자신의 역할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국 공산당의 관련 발언권 내지는 주도권 쟁취가 목적이란 의미이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항일 전쟁이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던 1937년 7·7 사변의 의미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덧붙인다.
네티즌의 반응은 더욱더 냉정하다. 몇몇 냉소적 발언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뭣도 모르면서 아는 척인가. 1931년에는 저항이 없었다. 항일전쟁은 무슨”, “지금부터 역사수업 취소하고, 모두 항일전쟁 드라마나 보자”, “동북항일연합군(東北抗日聯軍)이 국민당이었다면 14년으로 바꾸었을까?”, “항일 전쟁은 명나라부터 계산해야지, 1555년” 등등, 내용에 있어 옳고 그름 여부를 떠나 그들이 정부의 교과서 개정에 회의적 태도를, 나아가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과서 개정과 논란의 근대사,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러한 논란을 보면서 근래 한국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2015년 9월, 박근혜 정부는 교과서 국정화 작업을 추진하며,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바로잡고 역사 교과서 및 관련 필진의 이념적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서라 주장했다.
이에 찬성하는 인사들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후대에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국정화가 필요하다 주장한다. 그리고 2016년 11월 한국 정부는 각계의 반대와 논란에도 현장 검토본을 발표했고, 혼란스런 국내 정세에도 현재까지 이를 고집하고 있다.
반론을 제기하는 학계와 사회단체 인사는 역사학은 열린 학문임을 주장하고 있다. 국가가 규정하는 역사관에 근거해 후대에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해선 안 된다는 설명이다. 그들은 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말한다. 백번 양보하여 설사 그 의도와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 국정 교과서의 발행과 일선 학교에의 강제는 21세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현장 검토본 공개 이후에 적지 않은 오류와 편중된 서술로 이에 대한 논란과 비판이 한층 더 거세졌으며, 2017년 시행 여부도 불투명해졌다.
사실 완벽히 객관적인, 절대 불가변한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저명한 역사학자 E. H. Carr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규정했다. 그와 같이 역사는 해석이다. 동일한 시대와 장소를 살아간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며 또한 그런 경우가 다수이다. 때문에 정치, 권력 등의 외부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빈번하다. 특히 현대사의 경우 진행 중인, 미완성의 역사로서 그 해석을 둘러싼 문제와 논쟁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이어지기 마련이다.
역사의 연구나 교과서 집필은 부단한 토론과 합의를 거쳐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이다. 완벽한 하나의 결론이 나오긴 어렵다. 때로는 오류에 빠지기에 이를 고치는 과정도 필요하다. 따라서 상이한 의견이 맞서고 원만한 합의가 없다면,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공존을 허용해야 한다. 이를 간과 혹은 무시할 경우에 오류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근래에 중국과 한국에 나타난 일련의 논란이 어떻게 귀결될지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다양성 존중과 성찰, 그리고 온당한 합의가 있다면 그 결과는 더욱더 진실에 가까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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