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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 20년이 지났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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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5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하나의 중국(一個中國)’ 현재와 미래
한 때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 중 선두에서 질주했던 홍콩(香港)의 공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이다. 홍콩은 1984년 12월 19일 중·영 양국이 ‘홍콩에 관한 중영공동성명(中英關與香港問題的聯合聲明)’의 조인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중국에 반환됐다. 이후 ‘일국양제(One country, Two systems, 一國兩制)’를 따른 홍콩기본법을 기초로 특별행정구를 설립하고 향후 50년 동안 자본주의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비록 식민지의 식민(植民)이었지만 자유와 부를 누리고 있던 홍콩 사람들이 중화인민공화국에 통합되어 ‘하나의 중국’으로 편입된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당한 공포감이었다. 공산혁명기 중국공산당의 행적과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태 등 일련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 많은 홍콩인들은 ‘하나의 중국(一個中國)’, ‘조국(祖國)’ 보다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의 이주를 택했다. 한 시대를 풍미(風靡)한 이소룡, 주윤발, 장국영 등의 홍콩 영화산업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중국의 한 성(省)으로…홍콩인의 정체성 혼란
반환 20년, 홍콩 경제는 완전히 중국의 위안화 경제권으로 통합되어 가고 있다. 중국 대륙관광객이 1997년 22.1%(약 229만 명)에서 2016년에는 75.5%(약 4277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이들의 소비가 없이는 홍콩 경제가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2014년 후강퉁(沪港通), 2016년 선강퉁(深港通)으로 중국과 홍콩의 경제통합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상하이(上海)에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정치질서에서 홍콩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약속의 실천으로 자유민주주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 헌법과 홍콩기본법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중앙정부와는 구별되는 자유민주주의로 통치되고 있다.
그러나 친중파가 행정장관(行政長官)과 입법원(立法院)의 다수를 차지하고,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정치 전반에 미치기 시작하면서, 민주화 운동과 중앙정부의 방침에 반발하며 민주와 독립을 외치는 저항이 일상화되었다.
▲ 홍콩 우산혁명의 주역인 조슈아 웡(黃之鋒) 데모시스토(香港衆志)당 비서장을 비롯해 범민주파 활동가 25명이 28일(현지 시각) 저녁 홍콩 반환의 상징물인 바우히니아(金紫荊)상을 점거한 채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이후 경찰에 연행됐다. ⓒAP=연합뉴스
‘일국양제’는 법(法)의 실시에서 중국 내지(內地)와 홍콩을 하나의 국가 안에 동시에 두 개의 법역이 존재하도록 했다. 중국 내지는 사회주의 법제에 따라 전인대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통치되지만, 홍콩은 식민지 전통을 이어받은 영국의 보통법(Common Law)을 기초로 자본주의 법제를 시행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憲法)’은 중국 내지는 물론 홍콩에서도 최고법으로서 모든 법률의 해석, 적용의 근거다. 그러나 헌법, 전인대의 입법권·법률해석권이 홍콩 법규범과 충돌이 종종 대두되어 조화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영어, 광둥화(广东话) 중심의 언어에서 이젠 ‘보통화(普通話)’가 세력을 빠르게 확장하는 언어로 자리 잡았다. 시장에서는 물론이고 대학도 내지의 유학생이 차츰 캠퍼스를 차지하고 수업도 영어위주에서 보통화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홍콩인은 자기를 중국인으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지인의 거센 물결에 홍콩인의 존재감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중앙정부도 속도 조절에 힘쓰는 모양새이지만 그 큰 흐름을 막기란 역부족이다.
홍콩 ‘일국양제’의 도전과 시련
100여 년 분단으로 인한 중국 내지와 홍콩의 이질감 및 상호 불신은 ‘하나의 중국’ 정책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2003년 홍콩기본법 제23조 이행입법(‘국가안전법’) 반대 시위, 2014년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 요구와 ‘우산혁명’으로 불리는 민주화 운동, 2015년 전인대 홍콩행정장관 선거안 입법회에서 부결, 2015년 반체제 서점 ‘퉁뤄완(銅鑼灣)’ 관계자 강제 연행, 2016년 입법의원 선서거부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중국 중앙정부가 최근 ‘하나의 중국’ 정책에서 ‘일국(一國, 하나의 중국)’을 우선 강조하고 ‘양제(兩制, 두 가지 체제)’를 경시하는 경향이 여러 곳에서 감지되면서 갈등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갈등은 홍콩 내부에서도 친중파와 민주파, 독립파로 나누어져 대립하고 있다. 중국 중앙 정부는 ‘하나의 중국’을 혼란에 빠트리면 ‘일국양제’의 현 정치체제를 완전히 부정할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어 독립 세력과 신뢰는 더욱 약화되고 있다.
2016년 11월 <인민일보> 사설을 보면 “홍콩인이 다스리는 홍콩은 애국자를 주체로 한 홍콩인이 다스리는 홍콩이다”,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자들의 선거 출마와 입법회 의원과 같은 공직 취임을 금하는 것이 바로 ‘일국양제’와 홍콩기본법을 올바르게 관철시키기 위한 요구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의 ‘애국자’는 당연히 중국 중앙정부에 충성하는 애국자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파의 공직 저지는 홍콩의 민주적 다양성을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중국공산당 홍콩·마카오 업무협력소조 조장을 겸하고 있는 장더장(張德江)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올해 3월 27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홍콩기본법 시행 20주년 학술대회에서 “최근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홍콩이 부여받은 권한은 중앙당국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중앙당국이 위임한 것”이라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홍콩특별자치구는 중국 헌법과 홍콩기본법 제23조에 따라 외교, 군사를 제외한 독자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지만 중국 국가안전의 헌법적 의무는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국이 2003년 입법하려다 좌절된 홍콩 “국가안전법”의 재도입을 시사하기도 했다. 중국 내지는 이미 시진핑의 ‘총체적 안전관’을 기반으로 한 신’국가안전법(國家安全法)’을 2015년 입법했다.
▲ 지난 29일(현지 시각) 취임 후 처음으로 홍콩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AP=연합뉴스
‘하나의 중국’ 그 멀고 험난한 여정
2017년 7월 1일 홍콩 반환 20주년 기념식이 대대적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시진핑 주석이 취임 후 처음으로 29일부터 반환 20주년 기념행사와 캐리 람(林鄭月娥·59·여) 행정장관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을 방문한다. 시 주석 방문에 이어 항공모함 랴오닝호(遼寧號)가 기항할 예정이다. 그런데 매년 7월 1일 시위를 이어온 범민주파에서도 대규모의 반중 시위를 예고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의 길은 멀고도 험난한 길임이 홍콩 반환 시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분단되어 있었던 시간만큼 서로의 간극도 큰 것을 인정하고, 그 만큼의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만 진정한 통일, ‘하나의 중국’이 될 수 있다. 홍콩 반환 시 ‘하나의 중국’의 전제로 ‘일국양제(一國兩制)’, ‘항인치항(港人治港)’을 인정한 취지는 중화민족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모두가 인내하는 일체감으로 통일국가를 이루어 가자는 것으로 보인다.
분단국가의 통일과정에서 다양한 입장에 대한 설득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통일을 주도하는 측이 해야 할 역할이다. 우리의 남북통일도 ‘하나의 중국’으로 통일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문제점이 똑같이 예정되어 있다. 서로 이해하고 포용할 마음가짐이 통일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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