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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19.06.07]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2019.06.07]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한중관계연구원2021-01-28

조선족의 역사와 현재

천춘화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2017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범죄도시>를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잔인한 화면과 함께 관객들에게 각인되었던 또 하나의 그림은 조선족 조폭의 등장이다. 사실 조선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이 이 영화가 처음인 것은 아니다. 이미 <황해>(2010), <해무>(2014) 등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2017년에 불과 두 달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연이어 개봉된 <청년경찰>과 <범죄도시>에서 조선족은 조직적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범죄자 단체가 되어 있었다.

 

어쩌다가 조선족이 대한민국에서 이런 이미지가 되었을까? ‘조선족’이 환기시키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조선족’을 ‘조선족’이라 호칭하지 말고 ‘중국계 한국인’이나 ‘재중 동포’라고 부르자는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족’은 ‘중국계 한국인’이나 ‘재중 동포’와는 달리 그들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명칭이다.

 

아시다시피 중국의 조선족은 식민지시기 조선반도를 떠나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후손들이다. 일제의 침략을 피해 만주로, 일본으로, 러시아로 흩어져간 조선인들이 오늘날 조선족, 자이니치(在日), 고려인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광복과 함께 미처 돌아오지 못했던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인 것이다.

 

8.15 광복은 한국과 중국을 식민지 상황에서 해방시켰지만 그 해방이 그대로 평화통일국가로의 이행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한국은 남과 북으로 갈리었고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내전(해방전쟁)이 개시됐다. 그리고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조선인들의 귀환 물결이 이어졌다.

 

통계에 따르면 8.15와 함께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는 약 300만으로 추정되며 그 중 일본에서 140만, 중국에서 약 100만이 귀환한 것으로 집계된다. 중국에서의 귀환 인구는 해방 전 중국 경내에 거주하고 있던 인구의 50%밖에 되지 않으며 실제로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했던 조선인들 대부분이 귀환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특히 8.15를 전후한 연변 지역 조선인 인구의 변동 폭은 10%를 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중국 동북에 남았던 것일까?

 

8.15와 함께 가장 먼저 동북에 진출한 군대는 소련군이었다. 그리고 중국 측은 소련과의 중·소군사협정에 따라 동북 지역에 군대를 진출시킬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은 동북지역을 그들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중국군이 아닌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우선적으로 연변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1945년 11월 7일 중공연변인민위원회는 ‘告 中·韓民衆書’를 발표하여 조선인이 중화민족의 일원임을 천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북지역의 조선인들은 스스로를 중국 국민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소속감을 더욱 확실시한 것이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누구나 토지를 분배 받을 수 있었던 토지개혁은 오로지 농사지을 땅 한 뙈기를 바라고 만주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에게 있어서는 중국에 남기를 선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연변은 1948년 4월에 이미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완료함으로써 전국적으로 가장 이르게 토지개혁에 성공한 지역이 되었다. 이와 같은 토지개혁의 조속한 시행은 한편으로 연변 지역 조선인들의 귀환을 연기하고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 지역에서의 중국공산당의 세력을 안정화시키고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우위를 점하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인들은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진 당당한 중국 국민이 되었지만 그들은 다시 조국의 해방전쟁에 투입되어야 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卫国)’이라는 슬로건 하에 참전을 선포했고 조선인 부대를 대거 입북시켰다. 조선인 부대의 입북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전후 두 시기로 나뉜다. 전쟁 전 조선인 부대의 북한 입국은 마오쩌둥(毛澤東)과 김일성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이 시기 입국은 전원 무장해제를 전제로 한 개별적 입국이라는 조건 하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이때 북한으로 입국한 조선인 군대는 약 5만 5000~6만 명에 달하며 이들은 훗날 6.25 때 38선을 넘어 남진한 인민군 보병대 21개 연대 가운데 47%나 차지하는 10개 연대를 구성하는 주력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 대부분은 중국대륙을 누비던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항일무장대의 선봉들이었다. 전쟁 발발과 함께 1950년 10월에 조선인 부대의 2차 입북이 이어졌는데 이 시기 조선인들은 중국인민지원군에 편입되어 파병되었다. 이들은 북한이 보유했던 20만 병력 중 4만 이상을 차지하는 다수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베테랑 군인들이었다.

 

조선인들을 내세운 이와 같은 중국 정부의 처신은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전쟁 발발 전 북한으로 입국시킨 군대를 두고 미국은 중국이 한국전쟁의 발발을 조장하고 도왔다고 힐난하였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서 전쟁에 참전하고 조국의 건설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이며 성실한 책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국가도 간섭할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이렇게 조선인들은 두 개의 조국, 곧 낳아준 조국 북한과 키워준 조국 중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을 가지게 되지만 휴전이 선포되자 조선인들은 다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시해야 했다.

 

중국 거주 조선인들의 귀추는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해 결정지어졌다. 1952년 9월 3일 중국정부는 길림성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설립하였고, 1955년 4월에는 이를 다시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했다. 즉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명문화된 것이 1955년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이주민에서 두 개의 조국을 가져야 했던 특별시기를 거쳐 ‘조선민족’으로 호칭되었다가 다시 ‘조선족’으로 확정되기까지 이와 같은 조선족의 탄생 여정은 그대로 이산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은 끝내 조국이 아니었으며 조선인들은 피동적으로 정체성을 부여받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는 다만 이주 1세대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사항이다. 2세, 3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조국은 너무나 당연하게 중국이고 중국 내에서 그들은 소수민족 중 최고의 교육수준과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자부심 넘치는 존재들이 되어있었다.

 

현재 한국에 입국해 있는, 한국의 노동시장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이주민 2세들이다. 그들은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문화대혁명시기를 겪으면서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였고 그들 중 극히 소수만이 교육받을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하지만 3세들의 경우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2세들이 받지 못했던 교육과 향유하지 못했던 충족한 삶을 3세들은 충분히 누리면서 자랐고 이미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3세들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최고 학부를 비롯한 여러 대학과 유수의 대기업들에서 교직에 종사하거나 뛰어난 역량을 과시하고 있는 등이다. 이와 같은 3세들의 성장은 그들 부모님 세대의 헌신적인 노력과 뒷바라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 범죄도시>에서 보여 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는 극히 제한적인 것이고 그것은 어느 민족에게서나 공히 발생될 수 있는 현상이다. 조선족,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 편의 영화, 한 건의 기사 감으로서의 가십거리가 될 이유는 없다. 과거에 한국 역시 중동으로, 독일로 노무 수출을 강행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하나의 과도기였듯이 오늘날 조선족들의 한국 진출 역시 중국 조선족 사회의 한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44012#0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