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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19.07.15] 홍콩의 시위를 보면서
[2019.07.15] 홍콩의 시위를 보면서
한중관계연구원2021-01-28

다케우치 요시미와 마오쩌둥

심희찬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최근 홍콩에서 발생한 일들을 지켜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홍콩의 역사 및 현실에 관한 지식이 많지 않기에 조심스레 말을 꺼내야겠지만, 특히 중국정부의 대응과 관련하여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일본의 중국문학연구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90년대 이후 동아시아론의 유행과 함께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다.

 

다케우치와 문학적 당파성

 

1910년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다케우치는 구제고등학교를 거쳐 1931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지나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중국문학연구회’를 결성하고 잡지 <중국문학월보>(후에 <중국문학>)를 발행했다. 1943년 육군에 소집되었고 중국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패전 이후에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활약하면서도 일본공산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중국문학연구자로서 루쉰에 깊이 공감했으며, 일본의 근대화를 고통과 좌절을 토대로 성립한 것이 아닌 단순한 서구의 모방으로 평가했다. 특히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 및 그 반동으로 제시된 아시아주의 양자를 사상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케우치의 사상은 이미 신문매체 등에서 여러 번 소개된바 있고, 다양한 연구논문도 나와 있다. 다케우치 사상의 분석에 있어서 쟁점이 되는 부분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도 그가 1942년에 발표한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에서 제국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세계사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패전 후에도 이와 유사한 자세를 유지한 사실을 두고 여러 해석이 이루어졌다. 또한 다케우치와 민족주의의 문제, 혹은 조선인식에 관해서도 주목할 만한 문제제기가 등장한바 있다.

 

지면상 이 모든 논의를 소개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다케우치 연구자 중 한명으로 중국의 쑨거(孫歌)를 들 수 있다. 쑨거는 2005년 일본에서 출판한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竹内好という問い, 한국어판 2007년)을 통해 동아시아 전역에서 다케우치 연구를 선도하는 자리에 올라섰다. 놀라울 만큼 섬세하고 정치하게 다케우치를 읽어 내려가는 쑨거는 제국일본의 전쟁을 전면적으로 긍정한 그의 자세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기보다 오직 ‘역사에 참여하고 역사를 건설’하는 일에만 매달린 결과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에 참여하고 역사를 건설’하는 일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레토릭이 아니라 다케우치가 꾸준히 추구해온 ‘문학적 태도’로서의 ‘당파성’을 가리킨다. 문학적 태도로서의 당파성이란 “문학이 계속해서 현실정치에 스스로를 투입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새롭게 형성하며, 나아가 현실정치에서 자기를 선택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저항의 실체와 마오쩌둥

 

깊은 통찰을 토대로 실로 정교하게 이루어진 쑨거의 철학적·문학적 해석은 동아시아론의 발흥과 함께 한국에서도 일종의 다케우치 붐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다케우치에 관한 어떤 편향된 인식을 낳은 것처럼 보인다. 다케우치의 문학적 당파성은 한편으로 대단히 ‘정치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쑨거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필자는 큰 감동을 받으면서도 어째서 마오쩌둥 및 중국공산당에 관한 다케우치의 수많은 글들은 거의 다루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어렴풋이 가진 적이 있다. 쑨거는 다케우치가 말하는 ‘방법’이 “실체화의 사유가 주도적 위치를 점하는 일본의 지식계에서 진정으로 이해받기” 힘들었다며, 이에 유감을 표한다. 다케우치의 ‘방법’과 ‘실체’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케우치는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을 서구적 근대 및 제국주의,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체’로 간주하고 있었다.

 

패전 이후 60년 안보투쟁에 이르기까지 다케우치가 걸어간 사상적 궤적의 근저에는 마오쩌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케우치는 종종 현대중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쑨원, 루쉰과 함께 마오쩌둥을 들곤 했다. 1947년, 즉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한 <루쉰과 마오쩌둥>에서는 마오쩌둥을 ‘문학자로서’ 찬미하기도 했다.

 

“(마오의) 루쉰에 대한 경애는 루쉰의 문학적 생애가 개시되는 동시에 시작되었고, 계속된 고양을 거치면서 틈틈이 격려와 교훈을 얻었다. 이는 루쉰이 쑨원으로부터 교훈을 읽는 방법보다 더욱 커다란 것이었다. 루쉰은 전진했다. 그리고 마오도 전진했다.”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다케우치의 찬사는 1951년에 쓴 <평전 마오쩌둥>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으로 제시되는 ‘순수 마오쩌둥’, ‘근거지 이론’ 등이다. 그는 징강산(井冈山)에 머물던 시절 ‘마오쩌둥이 재생’했다고 한다. “이전까지 마오는 맑스주의자였다. 이제 맑스주의는 그와 합체했고 맑스주의와 마오쩌둥주의는 동의어가 되었다. 그 자신이 창조의 근원이 된 것이다. 이것이 순수 마오쩌둥, 혹은 원시 마오쩌둥이다.” 나아가 근거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근거지는 적은 강대하다는 인식과 나는 불패라는 확신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속에 이론적 기초를 가진다. 아무리 적이 강해도 근거지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불패인 것이다. 근거지를 뺏는 것은 어째서 불가능한가? 중국경제의 발달이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왜 불균등한가? 적이 강하고 내가 약하기 때문이다. 적이 강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러한 불균등을 낳고 근거지를 빼앗을 수 없게 만든다. 적의 강함과 나의 약함은 모순관계에 있는바, 이것이야말로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 근본요소가 된다.”

 

적이 강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승리의 열쇠가 된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쑨거는 2009년 중국 칭화대학에서 한 강연에서 이를 ‘변증법적 사고’, ‘전략적 위상을 넘어선 하나의 인식론’으로 평가한다. 물론 다케우치 본인도 근거지를 ‘철학적 범주’로 사고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평전 마오쩌둥>이 1951년에 저술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공산당은 1951년 2월 도시게릴라 투쟁노선을 확정했고, 10월에는 농촌에 근거지를 두고 도시를 포위하기 위한 산촌공작대를 조직했다. 일본의 좌익지식인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일본보다 근대화에서 뒤처진 중국이 맑스주의의 발전단계론을 무시하고 먼저 사회주의 혁명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공산당이 중국공산당의 모델을 따라 농촌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 혁명전술을 채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다케우치가 혁명의 ‘실체’로서 마오쩌둥과 근거지 이론을 제기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케우치가 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한 현실적 과제로서 농지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한편, 그 동력으로서 ‘무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구절을 보아도 근거지 이론이 단순한 철학적·문학적 사유의 일부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방법적 실체로서의 중국공산당

 

공부가 부족한 탓에 이와 같은 사실을 쑨거가 다른 글에서 다룬 적이 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쑨거가 중국공산당에 대한 다케우치의 글들을 거의 다루지 않는 것에는 연구자로서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문제는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라는 거북한 문제를 배제한 다케우치론이 한국 지식계에 떠돌게 되었다는 것이다.

 

루쉰을 통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고통의 사유를 습득한 다케우치가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을 찬미하는 모습은 매우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후의 마오쩌둥의 행보를 잘 알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눈에 다케우치의 관점은 중대한 결함처럼 여겨진다.

 

그렇지만 가령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전후하여 일본을 찾은 국민당 고위관료 장췬(張群)에 대한 일본사회 및 일본공산당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케우치는 결코 교조적인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마오쩌둥에 대한 다케우치의 높은 평가는 루쉰의 ‘쟁찰(掙扎)’에 대한 동경이 항일투쟁 및 국공내전을 거쳐 중국혁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실체화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당시의 다케우치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개념’과 ‘실체로서의 지역성에 의거한 저항’을 중첩시키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다케우치는 마오쩌둥 개인이나 중국공산당이라는 하나의 조직을 믿었다기보다, 중국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발견한 ‘저항하는 아시아의 실체’에서 시시각각 삶을 옥죄어오는 지배와 폭력에 대항할 근거지를 구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당파성은 문학과 정치가 착종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이 때가―일본의 사상가 간 다카유키(菅孝行)가 말한 것처럼―혹시 세상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꿈을 다케우치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시절이었을지 모른다. 훗날 다케우치는 마오쩌둥에 관한 자신의 기대가 오류였음을 인정했지만, 당시에 꾸었던 꿈까지 모두 부정하지는 않았다. 1970년대 이후 다케우치는 현실중국이 아닌 쿠바, 베트남, 팔레스타인, 남미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꿈에서 깨지 않기 위한 그의 몸부림에 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다케우치는 아직 꿈을 꿀 수 있는 것만으로 사상가로서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그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홍콩의 젊은이들과 그들에 대한 중국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다케우치가 이른바 근대와 자본주의가 가져온 노예적 상황을 끝장낼 수 있는 방법적 실체로 꿈꾸었던 ‘중국공산당’을 떠올릴 뿐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48968#0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