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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19.10.12] 두 개의 ‘고토(故土)’, 유동하는 정체성
[2019.10.12] 두 개의 ‘고토(故土)’, 유동하는 정체성
한중관계연구원2021-01-28

만주와 한반도 사이에 선 이방인들

천춘화 원광대 HK연구교수

 

 

고토

 

1910년 1월 5일부터 3월 6일까지 《대한민보》에는 빙허자(憑虛子)란 이름으로 《소금강(小金剛)》이란 작품이 총 48회에 걸쳐 연재된다. 구홍서라는 양반의 자제가 활빈당에 가입하여 두목이 되고, 휘하의 활빈당들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한다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아마도 한국문학사에서는 만주로의 집단 이주를 다룬 첫 작품일 것이다.

 

양반의 자제가 어찌하여 활빈당이 되었고, 또 어떤 이유에서 서간도로의 이주를 단행하고 있는 것일까? 구홍서의 부친 구도사는 갑신개혁당 중의 한 사람이었고 부친에게서 개화사상의 한계를 보아버린 구홍서는 조선 팔도를 방랑하며 세상 구경을 일삼던 중 강원도 보개산에 은신해 있다는 활빈당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의적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그는 적극적으로 활빈당에 투신하고, 두목이 된 뒤에는 부하들을 이끌고 서간도로의 집단 이주를 단행한다.

 

신소설 전체에서 놓고 보더라도 이 작품은 상당히 독특한 작품이며 우리 문학이 가지고 있는 만주에 대한 상상력의 시초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구홍서의 서간도 이주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떠났던 만주나 해삼위로의 이민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로를 보여준다.

 

그는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은 무지렁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서간도로의 이주를 위해 사전 답사팀을 파견해 현지 사정을 조사하는 등 치밀함을 보인다.

 

이주하기에 앞서 그들이 후보지로 선정한 곳은 북간도와 서간도 두 곳이었다. 하지만 답사 결과 북간도는 외국인이 많고 경쟁이 심한 반면에 서간도는 안거낙업하면서 실력을 양성하기에 적당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서간도 선정 경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목적하는 바는 안거낙업과 실력 양성이다.

 

위에서의 북간도와 서간도에 대한 서술상의 차이는 그저 텍스트 상의 표현일 뿐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당대의 현지 사정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당시 북간도 용정에는 이미 일본총영사관이 들어서 있었던 반면에 서간도는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곳이고 애국지사들이 진을 치고 이상촌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구홍서가 부하들을 이끌고 서간도로 간다는 것은 상당히 명확한 정치적인 목적을 앞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 간도는 원래 우리 땅이었는데 관리를 등한히 하여 청국에 빼앗긴 것일 뿐이고 간도로 이주하는 것은 그곳에서 농업에 힘쓰고 실업을 발전시켜 잃었던 고토를 회수하자는 데에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그들은 서간도에 이주하여 그곳의 조선인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에게 고토의식,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성공한다.

 

1910년대에 만주는 이미 수많은 조선의 빈고농민들이 이주해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었고 의식 있는 지사들이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고토를 수복할 희망을 꿈꾸었던 공간이었다. 만주는 그런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100년 전 가난한 농민들과 애국지사들은 살길을 찾아, 희망을 찾아, 독립의 꿈을 키우며 끊임없이 두만강을 건넜고 압록강을 건넜다. 하지만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의 후손들은 선조들이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온다.

 

다시 고토

 

1992년 한중수교와 함께 중국의 조선족 사회를 강타한 것은 “코리안 드림”이었다. 한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한국행이라는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다. 비록 표준적인 한국어는 아니지만 조선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언어적인 우세가 이와 같은 “코리안 드림”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처음에는 친척방문으로, 그 다음에는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이라는 새로운 정책 하에, 수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몰려들었다. 2014년 통계에 따르면 당시 한국 내 거주 조선족 인구는 6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이 한국에 입국해 종사하는 업종의 대부분은 서비스업을 비롯한 소위 ‘3D’업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에서의 여건보다 나으니 그들은 고단함과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한국행을 추진했다. 노동력 시장에서 환영 받는 젊은 세대들의 한국 진출이 늘고 있고 이와 같은 젊은 층의 인구 유출은 중국 내 조선족 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가장 심각한 것이 농촌 사회의 붕괴였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인구 유출인데 그것은 다시 노년층의 도시 이주와 젊은이들의 고향 이탈로 나뉜다. 노년층의 경우는 대부분 자식들이 자리 잡은 도회로 이주해가는 경우이기 때문에 별개의 문제이지만 심각한 것이 바로 젊은이들의 인구 유출이다.

 

젊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나오고 나면 시골에는 늙은이들과 아이들만 남게 된다. 부모님들은 열심히 한국에서 돈을 벌어 생활비를 송금하고 남겨진 아이들은 대부분 조부모의 손에 의해 양육되고 교육된다. 이러한 상황이 어느 한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조선족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데에 그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조선족 사회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이다. 조선족들이 한국행을 선택하는 절대 대부분의 경우는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선족 사회를 분석하는 일부 학자들의 연구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고토 의식”을 언급하고 있는 지점이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족들이 한국을 선택하는 데에는 우선적으로 언어적인 편리성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며 다음으로 이에 못지않게 작용하는 것이 “고국”, “고토 의식”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조선족들의 이와 같은 국제적인 이동을 “고토로의 귀환”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한국으로 입국하는 현재의 젊은 조선족들 중 한국을 “고토”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관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젊은 층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중국 조선족으로 자부한다. 하지만 외부에서 중국 조선족은 “중국에서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한국에서도 배척받는 틈새의 민족”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흔들리는 삶, 유동하는 정체성

 

남겨진 아이들의 교육 문제는 심각한 가정문제이자 중대한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농촌 조선족 사회가 붕괴되면서 조선족학교들이 폐교 되고 아이들은 자연히 중국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일부 아이들은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에 있는 부모 곁으로 와서 한국 현지 학교를 다닌다. 아이들의 경우는 한국에 와서 채 2년이 되지 않아 중국어를 몽땅 잊어버리는데 이런 현상은 저학년일수록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반면에 중국에서 현지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는 점점 한국어와 멀어졌다. 어렸을 때에는 그래도 조금 알아듣다가 커갈수록 한국어 실력이 점점 약해지고 나중에는 아예 하나도 못하게 되어버린다. 이들은 모두 조선족이다. 하지만 한중 양국의 조선족들이 나중에 만났을 때 그들은 한국어, 중국어가 아닌 제3의 언어로 교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조선족”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때까지도 “조선족”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조선족 사회의 대안으로 대도시에 새롭게 형성되어가고 있는 조선족공동체들에 주목해 볼 수 있다. 북경, 상해, 청도, 대련 등 조선족들이 집거해 있는 대도시들에는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고 한글 교육과 조선족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과 시도들이 의미 있는 결실로 맺어지기를 희망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60707#0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