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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0.07.03] ‘몽롱’한 중국을 바꾼 것은 ‘민중’
[2020.07.03] ‘몽롱’한 중국을 바꾼 것은 ‘민중’
한중관계연구원2021-01-28

1930년대 중국의 키워드는 ‘아편’과 ‘혁명’

이용범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천편일률의 중국 기행문들

 

1920~30년대 일본과 한국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중국 여행기가 유행했다. 일본의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1930년대 초반 중국을 여행하고 <중국유기>라는 글을 써내기도 했다. 그 시기에 유행한 중국 여행기들은 스타일상 굉장히 유사했다.

 

첫째, 자신이 방문한 장소에 관련된 중국 고전문학의 소양을 약간 적는다. 예를 들어 이백이나 두보의 한시, 제갈량의 ‘출사표’ 같은 것들을 관련된 장소에서 떠올리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는 ‘여행안내서’에 써있는 내용들을 다시 자신의 글에서 읊조리는 방식이다. 중국에서 절묘한 한시와 하이쿠들을 떠올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예외는 아니었다.

 

둘째, 1930년대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인지’에 대해 서술한다. 이러한 서술의 방향이 인도하는 것은 현대중국의 ‘후진성’과 ‘낙후함’이다. 다르게 말하면, 중국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과거’에 속한 것으로 규정하고, 지금 자신의 ‘선진적’인 모습과 비교하면서 비교우위를 재확인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만들어져간 ‘뒤떨어진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반복 재생산되며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을 형성하게 된다.

 

1931년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최창규, 장강 여행을 기획하다

 

한반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던 서양식 종합대학(university)인 경성제국대학에는 지나어학지나 문학 전공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어문학과가 설치되었다. 종합대학이라고는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취직난은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대개는 소위 ‘고등 룸펜’이라고 하는 실직자 신세였다.

 

1회 졸업생 최창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1930년 2월 졸업한 뒤, 뚜렷한 직장 없이 지내다가 1931년이 되어서야 <동아일보>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상하이로부터 출발하여, 장강(양쯔강)을 거슬러 쓰촨성까지 도달하는 문화·역사기행을 기획하게 된다. 이러한 기획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을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애초에 장강 여행을 위해서 중국에 간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구경도 할 겸 상하이에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상하이만큼 묘한 도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국제도시로서 자본주의의 또 다른 절정, 조계지 내부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계 각지의 사상가·활동가들이 모여드는 공간이자, 동아시아 지식인의 허브로 기능하기도 했던 우치야마 서점(內山書店) 등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근대적’인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그 장소의 경험은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죽하면 이 시기의 상하이를 일컬어 ‘마도(魔都)’라고 하는 책 <마도상해>(魔都上海)가 나올 정도였을까.

 

그렇게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경성제국대학 1회 졸업생은 70여 일에 걸쳐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의 길에 오르게 된다. 덧붙이자면, 장강을 거슬러 쓰촨에 이르는 루트는 2009년 싼샤댐의 완공 이후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아편의 유통과 국가시스템의 문란

 

최창규의 여행기의 특징은 중국 하층민과의 직접 교류 경험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이 기본적으로 지녔던 한문 소양 외에도, 대학에서 중국 문학을 전공했기에 회화가 가능한 수준의 중국어를 익혔던 덕분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어부와 흥정하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다.

 

나도 사람이니까 이것을 팔아서 아편도 먹어야 하고 담배도 먹어야 하고

 

다시 한배에 탄 자기 아내를 가리키며

 

저것들도 밥을 먹어야 하지안소. 이것이 오늘 하루종일 잡은것인데 그렇게 받아서야 어디 셈이 되오.”

 

밥보다 아편이 먼저 나오는 것은 마약의 중독성으로 설명될 수 있고, 또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한 서술전략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생각해본다면 중국 사회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200년에 걸친 세월 동안 중국 사회에 깊이 침투한 아편은 중국을 마비상태로 몰아갔다. 아편은 더 이상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인도와의 삼각무역을 통해 수입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내에서 생산되고 중국내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청(淸)이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지만, 여전히 국가는 아편의 생산과 유통을 용인하고 있었다.

 

아편중독은 개인의 심신을 파괴한다. 달리 말하면, 경제활동 인구를 ‘소모’시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국력의 저하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부는 지방 세력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군벌들이 장악한 지방정권은 단기적인 세수의 확보를 위해 국민의 건강을 소모시키고 있었다.

 

아편은 중국사회를 중층적으로, 또 입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삼민주의를 내세운 국민당 정부는 민권, 민주, 민생에 있어 혁명적인 변화를 제시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청에서 중화민국으로 넘어가면서 지방분권적인 수탈은 더 악화되었다.

 

다수의 하층민들에게 제국주의의 침탈은 서양 제국주의자의 얼굴이 아니라, 아편의 유통이 유지되는 것처럼 구사회의 지속이라는 형태로 간접적으로 다가왔다. 여행자이면서도 중국인과 함께 생활하고, 또 대화를 통한 소통을 통해 최창규는 고전 속에 있는 것이 아닌, 현실 ‘중국’의 모습을 관찰해내고 있었다.

 

아이들을 구하라” – 영속혁명에의 기대

 

루쉰의 <광인일기>는 “아이들을 구하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아이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육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현실을 면밀히 살피던 최창규도 비슷한 기대를 갖게 된다. 그것은 충칭(重慶)의 시립고아원에서 그가 마주친 <신청년> 잡지에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청년>은 중국의 신문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신문화운동을 거치며 중국사회의 대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데 있어 잡지가 거대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최창규는 고아원에 꽂혀 있는 <신청년> 잡지를 보고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혁명에의 기대를 암시하고 있었다.

 

아편에 취해 몽롱한 상태의 중국을 바꿀 수 있는 계기로 최창규는 민중을 꼽는다. 민중은 <아Q정전>의 아Q일수도 있고, 아편중독자일 수도 있으며, 가혹한 노동에 혹사당하는 인력거꾼이기도 했고, 혁명적인 변화를 추동하기 위해 북벌군에 지원하는 젊은이일 수도 있었다. 중국의 민중들을 움직였기에 신해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고, 다시 10년이 지나 신문화운동이 그 뒤를 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30년대 최창규는 수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국 민중이 다시 일어서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로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한국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민중에 의한 사회의 변화, 그리고 그것의 끊임없는 자기 갱신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70218223123960#0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