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1.01.08] ‘선의’의 중국이 외국의 ‘적의’를 마주칠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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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8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중국이 세계로 깊이 들어갈 때’ 마주하게 되는 사상적 곤경
“몇 년 전 누군가 나에게 중국이 패도(覇道)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면 나는 분명 주저없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지금 누군가 같은 말을 다시 한다면 나는 더 이상 그때처럼 주저없이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질듯하다. 단 몇 년 사이에 같은 문제에 대한 나의 반응이 이처럼 달라진 것은 이제 나도 슬슬 걱정스러워졌기 때문이다.” –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허자오톈(賀照田) 지음, 창비, 2018)
오늘날 중국을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허자오톈(賀照田)은 최근 인터넷에 넘쳐나는 분노한 젊은이들의 패권주의적 언설, 관방과 민간을 막론하고 강화되어가는 국가주의적 경향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국가로서의 중국, 그리고 개인으로서 중국인이 외국과의 교류과정에 겪게 되는 ‘불쾌감’들, 그리고 그 불쾌감들이 중국의 ‘패도’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자리잡게 되는 논리구조에 가 닿는다.
논리구조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의 시선은 보다 근원적인 장소로 향한다. “왜 우리는 선의를 기반으로 하여 국제협력과 교류를 하고자 하는데, 번번이 적대와 불쾌한 경험을 겪게 되는가?”라는 질문, 그리고 보다 세밀한 전후맥락을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허자오톈의 <중국이 세계로 깊이 들어갈 때>를 중심으로 중국의 세계인식의 구조와 문제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베이징 컨센서스로, 다시 ‘책임있는 대국‘에 이르기까지
▲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 (허자오톈(賀照田) 지음, 창비, 2018) ⓒ 창비
2004년 제안된 베이징 컨센서스는 시장주의와 민주주의, 그러나 사실상 신자유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대립개념으로, 정부주도의 중국식 시장경제 발전모델을 일컫는다. 경제발전의 성과와 자부심이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2008년 미국 경제위기와 맞물려 그 위세는 정점에 달했었다.
베이징 컨센서스가 비교적 경제적 측면에 치중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후 등장한 중국식 모델은 ‘보편가치’를 주장하는 특징이 있다. 경제적 측면의 자신감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어 나간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자기주장은 90년대 덩샤오핑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의 방침,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제기되었던 중국위협론에 대한 조심스러운 대응인 화평굴기(和平崛起) 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G2로 등극한 이후 제시되는 ‘책임있는 대국’ 관념에는 이와 같은 경제적 자신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책임 있는 대국‘이 마주하게 된 적의와 불쾌감, 그리고 대응
“왜 그처럼 많은 사회의 민중들이 중국대륙을 향해, 해당 사회에 속한 중국대륙의 공민을 향해 그처럼 강렬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일까?”
중국 사회는 이에 대해 대체로 세 가지의 해석과 대응책을 내놓는다. 첫째, 우리의 방향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선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전과 설명을 중심으로 한 국제교류 사업을 더욱더 확대하여 다양한 국가와 지역의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야 한다. 공자학원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현재 서구중심적인 사유와 가치체계가 세계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발전하여 압도적인 위상에 다다르게 되면 중국에 대한 편견도 변화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경제발전이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되는 발전지상주의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셋째, 특정 국가나 집단의 중국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감이 있고, 중국의 발전에 따라 그것이 더욱 강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자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더 강한 군사력을 추구해야 한다.
첫 번째의 방향성은 비교적 온건하고 점진적이며,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본질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가고 있는 경향이 크다. 이를테면 교류의 무산으로 인한 불안함을 경제발전과 군사력 확충을 통해 보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논리는 허자오톈이 우려한 것처럼 패권주의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발전주의와 경제발전의 트라우마
그러한 논리의 이면에는 경제발전만이 유일한 가치로 살아남은 황폐화된 사상의 풍경이 있다. 농담으로 시작되었던 “인민폐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인민 내부의 모순이고, 인민폐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적아(敵我)모순이다”라는 말은 현재 중국사회를 너무나도 투명하게 비추는 말이 되고 말았다.
기본적으로 국가는 경제발전을 위해서 사회문제를 해결했으며, 문제의 해결방식 또한 경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체제적 억압이나 폭력의 수단이 가해졌다. 돈으로 해결되면 중국 인민인 것이고, 돈으로 해결시키지 못하면 ‘적아모순’인 것이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풍자적으로 ‘화해시키다(被和諧)’라고 불렸다.
이렇듯 중국사회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가치는 경제발전이 되었고, 그것은 국제관계를 사유하는데 있어서도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중국 외교계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쌍영(雙贏), 공영(共贏)이라는 용어는 윈-윈(win-win)이라는 단어로 쉽게 치환될 수 있다. 상호간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이자 추구하는 가치가 되고, 그 외의 요소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친다.
이러한 경제적 측면에만 집중한 상호교류, 그리고 그에 대한 상대방의 싸늘한 반응은 어쩌면 1970-80년대 일본의 비즈니스 맨들이 유럽에서 받았던 평가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경제중심적 사고 또한 일종의 트라우마라는 점이다. 경제발전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시켰던 시대의 산물, 그러한 측면에서는 한국의 역사 경험에까지도 소급시킬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을 ‘타인‘으로 받아들여야
허자오톈은 중국이 타인을 상대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두 가지 방향에서 제시한다. 하나는 타인을 ‘타인’으로 받아들일 것에 대한 주문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나를 미루어 타인에 미친다(推己及人)’과 같은 사유는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이지만, 동일한 역사문화적 배경을 공유해야 효과적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다른 문화적 동질성이 떨어지는 ‘타인’과의 교류에서는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종교가 사회의 중심이 된 사회와의 교류에서 중국과의 차이점은 두드러진다. 그렇기에 먼저 ‘타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을 인지하고, 심화된 이해를 기른 뒤에 다시 ‘추기급인’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 군사적 측면의 성장에 급급한 현실에 대한 반성이다. 경제력, 군사력에 대한 추구는 어쩌면 서구 제국주의의 유산이기도 하다. 지난 19세기말 20세기초 서구가 아시아에 가져 온 갱생의 계기들은 흡수하되, 제국주의가 세계에 초래했던 다양한 문제들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 자신의 비상(飛上)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들이 비상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10716460138673#0DK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