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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2][전북도민일보] 경술국치 110년 기획특집 관련 기사
[2020.07.02][전북도민일보] 경술국치 110년 기획특집 관련 기사
한중관계연구원2021-02-04

전북인들의 집단이민이 시작되다

 

■일본의 야욕, 만주사변 그리고 만주국

 

1920년대말 일본의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를 비롯한 군부세력은 만주사변을 계획했다. 일본은 한인(韓人)의 민족해방투쟁을 말살하고 조선 국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만주사변은 일본이 한반도를 넘어 대륙 진출을 위해 교두보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만주지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사건이다.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일본 관동군은 봉천 외곽의 유조구(柳條溝)의 남만주철도 일부 구간을 폭파시키며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1932년 1월 금주(錦州)를 시작으로 4개월 만에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까지 일본 국토의 세 배에 달하는 110만㎢의 영토를 점령했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만주국을 수립했다, 연호는 ‘대동(大同)’으로 하고, 수도는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두고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傅儀)를 ‘집정(執政)’으로 삼았다. 일본은 9월 ‘만주국’을 정식 승인하고, 각 지역에 관동군을 주둔시켰다. 또한, 경제적 수탈을 위한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고 전시 체제에 편입시켜 개발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일제, 한반도 ‘국가총동원체제’ 만주까지 확대

 

일본은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만주를 넘어 중국본토를 상대로 팽창정책을 노골화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시기 일본은 만주를 생활권 전략기지로 개발하는데 중점을 뒀다. 한반도에서 실시된 ‘국가총동원체제’가 만주까지 확대됐다. 일본에게 만주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군수 물자를 위한 전초기지로서 중요한 지역이 된 것이다. 이 시기 만주지역의 농산물 생산량은 소비량에 못 미치고 있었다. 만주지역의 농민들은 수전농사에 익숙하지 않아 밭농사를 많이 짓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지 못했다. 또한, 개간된 지 않았던 미간지가 많았다. 일본은 토지 이용 방책을 강구했다. 일본은 미간지 이용방안을 적극 검토한 결과 개간을 위한 인적 자원 수급이 필요하게 되었고 만주로의 일본인 이민정책이 실시됐다. 일본은 1937년부터 1941년까지 500만명 이주 계획을 세웠으나 42,000여호가 이주했다.

 

일본은 이주 계획이 실패하자 한인의 집단이주를 계획했다. 또한, 안정적인 식량 보급을 위해 일본은 수전농사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전라도 농민들의 집단이주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전주·남원·진안·무주·완주·고창·금산·임실·부안·익산·김제·정읍에서 터을 잡고 살던 전북인들이 만주로 강제 이주했다. “일만 잘하며 잘 살 수 있다”는 말에 집단 이주했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전주·남원·진안·무주·완주·고창·금산·임실·부안·익산·김제·정읍에서 터을 잡고 살던 전북인들이 만주로 강제 이주했다. “일만 잘하며 잘 살 수 있다”는 말에 집단 이주했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일제가 주도한 전라북도 농민 집단 이주

 

1905년 이후 일본의 강압으로 국내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자 한인들은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 동기는 첫째는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이었고, 둘째는 빈민층이었던 한인들이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떠났다.

 

만주로 간 한인들은 수전농사를 하며 대량의 쌀을 생산했다. 1921년에는 총 면적이 73만무, 수확량이 123만 4,000여 섬이었으며, 1930년에는 총 면적이 900여만무, 수확량이 1,300여만 섬에 이르렀다. 일본은 만주에서 농업 생산량 증대를 위해 자국민 이민정책과 함께 한인을 집단이민의 형태로 강제 이주시켰다.

 

1936년 만주국은 자본금 1,500만원을 투입해 만주척식회사(이하 만척)을 설립했다. 만척은 토지· 농사 관리, 한인 집단 이민정책 업무도 담당했다.

 

만척은 알선업체로서 한인 농민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당시 이 회사 간부 고견성(高見成)은 만주국 성립 이후 한인 이주 증가 추세를 유지한다면 10년 이후에는 150만명, 20년 이후에는 2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와 만척의 이주 계획에 대해 전라북도는 국책 사업에 협력해야 한다는 취지하에 ‘전라북도이민협회’를 설립했다. 전라북도이민협회는 국책 사명 완수를 목적으로 한다고 선전하고 전라북도 농민들을 집단이주시켰다. 그렇게 전라북도 농민들에 의해 수전농법 기술이 만주에 뿌리내리고 일제는 수탈을 노골화했다.

 

두만강 국경 경비병

두만강 국경 경비병

 

■전주·남원·진안·무주·완주·고창·금산·임실·부안·익산·김제·정읍에서 만주로 이주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1936~1942)는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장려하며 1939년의 한 연설에서 장기적으로 1백만 세대 500만명 목표를 발표한다. 그렇다면 이주민 중 전북인은 얼마나 많았을까?

 

정해련(무주 출신 1927년생) 노인은 1939년 봄 안도현 안도촌 남도툰에 99세대와 함께 집단 이민했다. 툰(둔:屯)은 시(市) 중국 동북지역에서 ‘마을’을 나타내는 단위다.

 

“전라북도 전주, 무주, 안성 등에서 100호가 모집돼 왔다오… 1938년 작은 아버지께서 먼저 안도현에 소사하 무주툰에 집단이민을 왔댔소. 그러니 작은 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편지를 보내기를 간도엔 땅이 많아 부칠수 있고 만척에서 식량도 집도 주니 오라는 것이였소”

 

정해련 노인은 1938년 작은 아버지가 먼저 집단이민을 하고 뒤따라 100호와 함께 집단 이주했다. 류영석(익산 출신 1924년생) 노인도 1939년 봄에 가족들과 함께 집단이주했다.

 

“안도현 량강촌 강남툰에 100호와 함께 왔소.…집이 다 뭐이겠소? 아무것도 없지. 우리는 나무를 베여다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돋자리를 씌워 가리고야를 만들고 그 속에 들게 되었소. 한 막에 50명씩은 들었는데 정말로 기가 막혔지… 만척에서 식량을 배급주었는데 다 뜬내가 나는 수수쌀도 제대로 배부르게 주는 것이 아니였소”

 

류영석 노인 역시 100호와 함께 1939년 강남툰에 집단이민을 왔다.

 

전라북도에서 만주로 향한 이주민의 길은 매우 험난했다. 대부분의 이주민은 기차를 한 번도 갈아타지 않은 채 사흘 동안 이동해 명월구에 도착했다.

 

도착 후 또 다시 트럭 혹은 마차를 이용해 각 지역으로 이동했다. 트럭에 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린이와 노인 등 약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걸어갔다. 이마저도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였고 정착지에 도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만척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전라북도 출신 이주민을 매회 100여 가구를 알선·모집해 이주시켰다. 전라북도 이주민의 출생지는 전주, 남원, 진안, 무주, 완주, 고창, 금산, 임실, 부안, 익산, 김제, 정읍 등 다양했으며, 1930년부터 1945년 봄까지 안도현 남도툰·무주툰·북도툰·전북툰·정읍툰, 왕청현 등지에 거주했다.

 

이주민의 거주지 현황을 살펴보면 안도현 남도툰의 경우 전주, 남원, 진안, 무주 출신이 많았으며, 북도툰은 완주, 남원 출신이 대다수였다. 강남툰에는 익산, 고창 등 출신이 많이 거주했다.

 

1930년대 초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 이주민은 약 100만명으로 추산된다. 1945년 해방 당시에는 220만명 정도였다. 1930년대 초부터 얼마나 많은 전북인이 이주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전라북도 인구는 포화상태였다. 이에 일본은 전북인을 만주로 집단이주 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전북인이 만주로 향했는지 예상할 수 있다.

 

만주로 간 이주민 초가집 거주

만주로 간 이주민 초가집 거주

 

■일만 잘하면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처음 도착한 이주민은 일본의 계획에 따라 미간지에 대부분 배치됐다. 무주툰·북도툰의 경우 사람이 살지 않는 숲속에 마을을 만들었다.

 

다른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라북도의 지형 특성상 평야지대에서 거주했던 이주민에게 만주의 산림지대에서의 적응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이처럼 전북 이주민을 힘들게 한 것은 자연 환경의 변화였다. 대부분의 이주민에게 집이 보급되지 않았으며, 물이 바뀌고 식량의 부족 등으로 많은 이들이 병에 걸리기 일쑤였다. 산림지대의 특성상 모기와 벌레가 많아 고생했다. 지역적 특성에서 오는 어려움보다 힘들었던 것은 만척의 행태였다.

 

김옥자(김제 출신 1938년생) 할머니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일본사람한테 속아 여기로 왔지요.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어머니가 아들 딸을 열셋이나 낳았는데 일곱살이나 여덟살을 먹고서는 다 죽더랍니다. 그래 나를 살리겠다고 엄마가 어디가서 물어보니 딸이나 자식을 살리려면 북쪽으로 몇천리 가라고 하더랍디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자꾸 앓고 하니깐 술김에 이민에 보내자했다 말입니다. 일본사람들이 그때 여기로 오면은 식구에 따라 숟가락도 내주고 집도지여 주고 밭도주니 일만 잘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선전했답니다.”

 

김옥자 할머니는 만척과 조선총독부에서 할머니의 부모님을 속여 이민을 오게됐다. 딸을 살리는 방법으로 북쪽으로 향하라는 말과, 집도 지어준다고 속여 이주시켰다. 만척의 선전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앞서 류영석 노인은 강남툰에 도착하였을 때 집도 없어 부모님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만척에서 주는 논 한쌍을 가꾸었소. 그때 출하는 논과 밭의 면적에 따라 바치였다오. 우리 집에서는 논 한쌍을 부치는데 벼소출이 2,000근이 되나마나 하였지. 그런데 출하는 벼로 1,000근을 바쳐야 했거든. 그러니 소출의 절반을 출하로 바치는 셈이지. 그때엔 농사가 잘되던 못되던 그 1,000근을 무조건 바쳐야 했소”

 

만척의 사람이 이주민을 동원해 토성 쌓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당시 이주민이 정착한 대부분의 지역은 치안이 매우 좋지 않았다. 마적이 등장하고 독립군이 식량과 의복을 요구했다. 만척은 이를 막기 위해 이주민을 강제 동원해 토성을 쌓았다.

 

또한, 만척은 집단 이민자들에게 정착하는데 쓰인 비용을 갚도록 했다. 여기에는 기차 비용, 집짓기와 소, 수레 등 생산도구를 빌려준 비용, 밭과 논 개척비용, 땅 값 등을 모두 포함돼 있었다. 만척은 한반도의 한인(韓人) 집단이주를 실시하고 통제와 강제성을 내포한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인터뷰>이석형 연구원

 

만주사변과 만주국이 수립되자 전라북도의 농민은 강제로 집단이주 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수탈과 탄압의 대상이 되어 해방 이전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만주 이주정책의 선전은 현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만척의 꾐에 빠져 이주했던 전라북도 이주민은 굶주림 속에 살았고 이들은 아직도 “죽지못해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 공민으로 살아가는 조선족 중 일부는 70, 80년전 우리와 함께 전라북도에 거주하던 한민족이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조선족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만주국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철저한 탄압과 기술을 선보이며 일본인은 ‘안전농촌’을 설립했습니다. 안전농촌을 세운 일제는 ‘치안의 담보’와 수탈의 가속화를 함께 추진했는데 그 중심에는 한인 이주민이 있었습니다. 전북 출신 이주민 대부분은 “그땐 정말로 죽지 못해 살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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