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2020.07.16][전북도민일보] 경술국치 110년 기획특집 관련 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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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2-04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집단 마을 건설 토성쌓기와 마적의 습격
원광대다이멘션연구단 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 <6회>
■ 전북지역 농민의 농지이탈 1930년대 중반 전라북도 지역에는 일본인 지주의 ’대농장-수리조합-농업학교’가 결합된 ‘농업 스테이션’이 완비된다. 일제는 농업스테이션을 가동해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증가된 수확량보다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수탈했다. 1910년대 16.7%였던 일본으로의 쌀 유출은 1930년대가 되어 46.1%에 달하게 된다. 한국에서 생산된 쌀의 절반을 일본에 빼앗기게 된 것이다. ‘농업 스테이션’완성은 전라북도 지역의 농민들을 농토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용을 했다. 일본인 지주들이 중심이 된 수리조합은 각종 명목으로 농민들을 수탈했다. 댐과 보를 증축하고 물길을 새로 내는 대부분의 비용과 노동력을 농민들로부터 징수했다. 소수나마 남아 있던 한국인 중소 지주와 자작농들은 각종 압박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신들의 토지를 넘겨주게 된다. 적지 않은 수의 소작농들 또한 생산량의 70%에 달하는 부세를 견디지 못하고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떠나거나, 날품팔이로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수준의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만주국 건국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 전반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다. 또한, 만주 지역의 장악을 위해 일본인과 한국인을 만주지역에 이주시켰다.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 이유는 그 지역을 ‘일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한국인, 특히 전북인들을 이주시키는 목적은 만주지역의 넓은 토지를 활용해 농업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만주지역은 청(淸) 황실의 발상지로 수백년간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었기 때문에 지역개발의 가능성과 필요성이 매우 컸다. ■ 농민들에게 뻗쳐 온 검은 손길, ‘집단이주’ 일본은 만주지역개발과 집단이주를 복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각종 회사를 설립했다. 만선척식 주식회사(滿鮮拓殖 株式會社)가 그것이다. 줄여서 만척, 또는 선척으로 불리는 이 회사는 한국에서 이주민 모집과 만주지역으로 이주와 집단촌 개척을 수행했다. 만척은 이주민 모집을 위해 특히 생계가 막막한 이들에게 접근했다. 농사짓는 땅 없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며 먹을 것이 없어 배곯는 것이 일상이었던 이들에게 식량과 땅을 주겠다는 말은 그보다 솔깃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한국에만 남아 있는다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말부터 일제는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용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굶어 죽거나, 징용에 끌려가거나. 한국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점차 줄어드는 상황에서 만주에만 가면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 수 있다는 홍보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했다. 일제가 기획한 집단이주는 대체로 군 단위로 100가구를 모집하는 방식이었다. 하나의 군에서 충분한 가구를 모집하지 못할 경우는 인접한 2~3개 군을 묶어서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집단이주는 연간단위로 진행됐다. 1938년이 1차, 1939년이 2차였고 1940년대에까지 이어졌다. 100가구, 약 5~700명으로 구성된 집단이민은 철도를 이용해 이동했다. 100가구가 철도로 이주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다. 이불과 각종 살림살이를 온 가족이 이고 지고 특별열차에 올랐다. 맷돌과 다듬잇돌, 절구, 장독까지 생활도구 등 모든 것들을, 한 마디로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당시 이리역을 출발한 호남선 열차는 서울에서 경의선으로 갈아타고, 신의주에서 압록강 건너 안둥(安東, 오늘날 단둥시)에 도착해 안봉선(安奉線)을 경유하고 안도현의 명월구(明月溝)에서 하차했다. 명월구에서 내린 일행은 운이 좋은 경우 트럭이나 마차를 타고 목적지로 이동했다. 어린아이나 노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10~50㎞ 거리를 도보로 이동했다. 수백킬로미터를 그렇게 도착한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기보다는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찬 원시림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은 들판도 넓고 벼농사를 하였는데 이곳은 온통 산과 나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죽을 곳을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김량순(김제 출신 1928년생) “우리 고향 익산에서는 논농사만 했댔는데 논이 없는 이런 산골에 와보니 밭농사를 지을 줄 알아야지? 그래서 다른 곳으로 도망을 치는 집들도 있었어” 류영석 (익산 출신 1924년생) ■ 전북을 떠난 이주민들, ‘천막에 살며 토성과 집짓기’ 그렇게 도착한 나무밖에 없는 곳에 이주한 전북인들은 일본인들의 감시속에 마을을 건설했다. 집단촌으로 선정된 부지에 천막을 치고 남자들은 거주하고, 여성과 아이들은 인근의 한족마을이나 먼저 건설된 집단촌을 오가며 생활했다. 자신이 살 집도 짓지 못하고 단체로 땅굴 형태의 임시가옥에 거주하는 삶의 조건은 매우 가혹했다. 땅에서 습기가 올라오고, 뱀들이 기어다니는 등 고초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전북인들은 나무를 베고 길을 닦으면서 마을의 형태를 점차 갖춰 나갔다. 일제는 각 가구의 집을 짓는 일보다도 마을을 둘러싼 토성쌓기를 우선시했다. 100가구의 이주민들을 10가구를 묶어 반으로 편성하고, 반별로 할당량 경쟁을 시켰다. 가장 먼저 달성한 반에게는 포상을 주고, 가장 성과가 떨어지는 쪽에는 벌을 주는 방식이었다. 일본인 경찰이 칼을 차고 지키고, 만주군 경찰들은 총을 들고 감시했다. 전북인들은 꼼작 없이 밤낮으로 토성을 쌓는 일에 참여했다. 토성은 높이 3~4m가량으로, 가로·세로 100m의 정방형 형태였다. 3면으로 문을 내고, 각 모서리에는 경계초소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토성밖에는 해자를 파고, 해자 앞에도 다시 나무를 짜서 목성(木城)을 만드는 ‘요새화’ 작업에 동원됐다. 이러한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가족이 살 집을 지을 수가 있었다. 토성이 완성된 이후 사람들은 주변의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일제는 아침 일찍 사람들을 깨워 토성 밖으로 내보내고 해가 질 때까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던 장소를 밭으로 개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밭농사를 짓는 것도 전라북도 출신의 농민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도전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논농사가 발전했던 전라북도에서, 밭농사라고 해야 논두렁에 콩을 심는 수준에 불과했다. 밭농사는 새로운 도전과 더불어 수리시설을 만들고 논을 만드는 또 다른 고생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제는 만척을 통해 사람들에게 식량을 배급했다. 당시 만주국은 일본인은 1등 국민이라고 해서 흰쌀을 주고, 한국인은 2등 국민으로 분류해 좁쌀을 줬다. 만주인, 중국인에게는 기장이나 다른 곡식을 주는 식으로 철저하게 차별대우했다. 이 또한 식량배급은 공짜가 아니었다. 만척은 가구별로 소 한 마리를 주고, 가족 수에 따라 병아리와 돼지를 배급했다. 달구지는 10호에 한 대씩 지급했으며, 이 모든 것들이 빚으로 매겨졌다. 만척은 전라북도에서 만주까지 기차 삯, 집을 짓는데 소요된 자재비용, 농사를 위해 지급한 소와 각종 농기구, 땅값을 모두 계산해 각 가구에 고리대를 매겼다. 만주에만 오면 “집도 주고 숟가락도 준다”고 했던 일본의 선전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 만주국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처럼 치안이 불안했다. 1930년대 만주는 국내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 놈’처럼 치안이 극히 불안한 지역이었다. 매우 넓은 지역에 중국군벌, 일본의 관동군, 만주국 군대, 독립군, 마적이 난립했다. 일제가 토성을 쌓게 한 것은 그러한 불안한 치안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00가구가 사는 마을에는 파출소보다 작은 단위의 분주소(分住所)가 설치되어 만주국 또는 일본경찰이 상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찰은 한국인 출신 친일파인 경우가 많았다. 집단촌은 독립군과 마적(馬賊)의 좋은 타겟 이었다. 당시 독립군은 집단촌에 들어와 한국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 다만 식량과 소를 가져갔다. 소와 식량이 없으면 주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일제가 다시 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실제로 일제는 별 수 없이 독립군이 가져간 소와 양식을 다시 내줄 수밖에 없었다. 독립군은 주민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리 조선민족은 일본인들 때문에 중국 땅에 와서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일본 제국주의를 중국과 조선에서 몰아내야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날이 옵니다.” 어느날 독립군은 “모두들 일제에 의해 강제이민을 와서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라며, 소를 잡아 주민들에게 대접하기도 했다. 독립군이 왔다 가면 일본군이 찾아왔다. 일본군은 마을에 들어와 독립군의 본부로 안내하라며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음식을 내놓으라고 시켰다. 일본군들은 마을 사람들이 해준 밥을 먹고 놋그릇과 수저를 마구 가져갔다. 주민들에게는 일본군보다 마적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마적은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고 말 그대로 물건들을 약탈했다. 그렇기에 주민들도 마적이 오면 경찰과 함께 자위단을 구성해 총격전을 벌였다. 마적들이 습격해 오면 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산 속으로 대피하기도 하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경우 벙어리 흉내를 내며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견뎌야 했던 것은 외부의 습격뿐만 아니었다. 내부에서 한국인들을 괴롭혔던 것은 친일파 조선인이었다. 마을에 한 명 정도 배치되었던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장몽둥이란 사람은 얼마나 지독하던지. 같은 조선사람인데도 일본인들의 개질을 하면서 말이요. 광복이 나자 피해를 받은 백성들이 그를 잡겠다고 달아다녔소. 그 사람이 부엌 아궁이로 기어들어 갔는데 피해자들이 부엌의 솥을 들고 수류탄을 던져넣는 바람에 장몽둥이는 황천객이 되고 말았소.” 박용구(부안 출생 1930년생)
■ 인터뷰 이용범(문학박사) 연구교수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지금도 전북지역 지명이 많습니다.” 중국 연변조선족 자치주 마을 이름에는 약간의 규칙이 있습니다. 행정구역상 지정된 마을의 이름은 촌(村)으로 끝나고, 사람들이 만들어서 붙인 이름은 툰(屯)으로 끝납니다. 툰으로 끝나는 마을의 대부분은 한국의 지명을 따라 짓는데, 전라북도 지역의 지명이 가장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전북툰, 무주툰, 정읍툰, 장수툰 등 만주의 전북인들은 “제 고향이 그리워 고향 이름을 달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나라 없는 백성으로 겪었을 그들의 고생과 수난의 일대기들을 정리하는 가운데, 한 노인분의 말씀이 자꾸만 기억에 아른거립니다. “너의 고향은 한국 전라도니까 어느 때든 조선이 통일되겠으니까 꼭 고향에 다녀가 할아버지랑 고모랑 만나보라고” 우리의 과거는 언제쯤 쉴 수 있을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결코 잊혀져서는 않됩니다. 이들 강재 이주민들의 증언을 듣노라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익산=김현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