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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1.06.14] 동아시아 3국의 교과서에 모두 실린 유일한 작가, 루쉰
[2021.06.14] 동아시아 3국의 교과서에 모두 실린 유일한 작가, 루쉰
한중관계연구원2021-06-14

세계최초의 루쉰 번역자 류기석, 루쉰의 내심(內心)을 간파한 정래동

이용범 | 원광대 HK연구교수

 

동아시아 3국의 교과서에 모두 실린 유일한 작가

 

동아시아 출신으로, 동아시아 3국의 교과서 모두에 자신의 작품이 실렸던 문학가는 몇 명이나 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외로 수효를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지역을 풍미했던 유럽중심주의와 근대중심주의로 인해 ‘로컬’들이 심히 폄하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가운데 20세기 초중반까지 한국은 일본작가들을 열심히 읽었지만 좀처럼 티를 내지 않았고,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의 작품은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기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히 인정받는 작품이 무엇인지 가려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무이하게 동아시아 3국의 문학 교과서에 실렸던 것이 루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고향>이다. <고향>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작품의 구성과 필치, 그리고 감성 모두 일종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바가 있다. 작품의 중심에 근대인의 노스탤지어를 배치하여, 근대화, 산업화 과정을 함께 겪어나간 동아시아 지역에서 깊은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중국에서의 광범위한 수용은 두말할 나위 없거니와, 일본의 연구자 후지이 소죠(藤井省三)는 <고향>이 일본의 ‘국민문학’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지적했고, 한국에서는 민족시인 이육사가 1936년 12월 이 작품을 번역하여 <조광>에 게재하기도 했다.

 

최초의 번역들 한국의 선택, 일본의 선택

 

루쉰이 세계적인 명망을 얻을 수 있는 데에는 번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기본적으로 문학작품은 번역되지 않으면 국경을 넘어 이동하기 어렵다. 세계문학, 비교문학을 논하는 데 있어서 번역은 가장 중요한 결절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 자신이 번역가이기도 했던 루쉰의 작품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퍼져나가 이미 루쉰 생전에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지만 루쉰작품의 번역은 첫 번째 작품인 <광인일기>의 발표이후 약 10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번역을 어렵게 만들었던 요인 중 하나는 중국의 신문화운동이었다. 3·1운동과 역사적 상동성(相同性)을 지니는 5·4 신문화 운동은 문학에 있어 본격적인 구어(口語)의 사용, 곧 백화문의 전면사용을 내세웠다.

 

입말로 돌아가자는 방향성은 타당했지만, 고문(古文)에 익숙했던 한국과 일본 지식인들은 다시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중국 백화문에 대한 지식이 약했던 백화 양건식이 루쉰의 <아Q정전>을 번역하며 노출한 셀 수 없는 오역들이 좋은 예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쉰 작품의 외국어 번역은 루쉰 형제가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922년 6월 4일 자 <베이징 주보>(北京週報)에 루쉰이 <토끼와 고양이>를, 동생 저우줘런(周作人)이 <쿵이지>(孔乙己)를 번역한 것이 처음이었다.

 

루쉰 형제가 아닌 사람에 의한 세계최초의 루쉰 작품 번역은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루쉰형제의 번역으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른 1927년 8월 <동광>에 실린 류기석 번역의 <광인일기>였다. 류기석은 루쉰의 열렬한 독자로, 루쉰의 본명인 저우수런(周樹人)을 따서 자신의 필명을 류수인(柳樹人)으로 삼기도 했다.

 

일본어로의 번역은 그보다 2달이 늦은 10월의 일로, 무샤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実篤)가 주관하던 잡지 <대조화>(大調和)』에 실린 <고향>이었다. 일본어 번역자는 불명이며, 번역의 수준도 그다지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반면, 류기석의 번역은 매끄러운 편으로 특히 중국과 한국의 다른 문화를 잘 이해하고 언어의 맛을 살린 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광인일기>가 가장 먼저였을까?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루쉰의 작품 중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유행한 작품은 <고향>이었다. 그런데 류기석은 루쉰의 데뷔작이기도 한 <광인일기>를 선택했다. 이러한 선택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류기석은 훗날 중국의 한국학자 이정문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광인일기>를 읽고 난 자신의 감회를 전했다.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으나, 여러 번 읽고 나자 미친듯이 흥분했고, 루쉰 선생은 중국의 광인을 묘사한 것뿐만 아니라 조선의 광인을 묘사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작품을 단순히 중국에 국한하지 않고, 전통문화의 질곡에 괴로워하는 보편적인 인간을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광인일기> 선택의 동기는 무엇보다 중국과 한국이 공유하고 있던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무엇보다 일본에 번역된 첫 작품이 <고향>이었다는 점과 날카롭게 대비된다.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성취했다고 자부하던 일본에서는 사회를 구속하고 있는 전통도덕의 허위를 폭로하는 광인의 목소리보다는 도시에 거주하는 근대 지식인의 아련한 노스탤지어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국에서는 <광인일기>에 이어 1929년 <두발 이야기>가 번역되었다. 한·중 양국의 전통사회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던 단발문제를 다루는 것을 통해, 도시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던 근대화가 농촌지역과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되는, 시골에서는 오히려 전근대적 사회질서가 강고하게 유지되던 ‘식민지적 근대화’의 전형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요컨대, 한국에서의 루쉰 번역은 한국과 중국이 공유하는 사회문제, 특히 전통의 문제로 초점화되었던 것이다.

 

내면의 고백, <들풀>의 발견

 

한국과 일본의 루쉰 수용의 분기가 이루어지던 시점, 중국의 루쉰은 사상적 전환을 겪고 있었다. 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기존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소박한 진화론적 사유로부터 계급론적 사유로의 이행이다.

 

이 시기 루쉰에 대한 중국문단의 평가는 루쉰이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시기 중국 비평계에서 마오뚠(矛盾)은 <들풀>을 아예 분석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았으며, 첸싱춘(錢杏邨)은 루쉰과 그의 시대의 종언 – “아Q의 시대는 갔다” – 을 선언했다.

 

실제로, 루쉰은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며, <들풀>은 루쉰의 방황과 몰락을 예시하는 작품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 때 루쉰의 <들풀>에 처음으로 주목한 것이 정래동이었다. 중국 베이징의 민국대학을 졸업한 그는, 당시 한국에서 루쉰의 작품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극소수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동시대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들풀>에 대해, “루쉰의 사상이 투철하게 반영된”, “루쉰 전 예술의 결정품”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면서 문학의 본질을 작가의 고민이라고 파악하며, 루쉰의 인류와 사회에 대한 고민이 집약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발현된 것이 <들풀>이라고 밝혔다.

 

정래동의 이러한 선견지명은 이후 루쉰을 사상자원으로 삼아 독자적인 사유의 경지를 개척해나간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왕후이(汪暉) 등을 통해 다시금 입증되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61108372994797#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