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한국사에 극적으로 등장한 영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맥아더는 동아시아와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이자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로 ‘태평양의 시저’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이다. 이 글에서는 맥아더와 동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관계를 통해 동아시아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존재하지도 않은 필리핀 육군의 원수 맥아더
맥아더는 아버지 아서 맥아더 2세(Arthur MacArthur, Jr.)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1898년에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스페인 식민지인 필리핀으로 출정하게 되면서 맥아더 가문과 필리핀의 인연이 시작된다. 전쟁 결과 스페인이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하자 미국-필리핀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에서 아서 맥아더는 필리핀 군정장관으로 승진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맥아더는 미국에 남아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당시 맥아더의 어머니는 육군사관학교 가까이에 있는 호텔에서 생활하면서 맥아더의 학교생활을 감시했으며, 심지어 맥아더가 데이트를 할 때도 동행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 결과 1903년에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아버지가 있는 필리핀에 배치되었다. 이후 1906년에 귀국하여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제25대)의 요청으로 대통령 군사고문 보좌관에 임명된다.
맥아더가 다시 필리핀에 부임한 것은 1922년에 필리핀의 마닐라군관구사령관에 임명되면서이다. 이후 맥아더는 1925년에 미국육군사상 최연소 소장(당시 44세, Major General)으로 승진하여 본국으로 귀속되고, 1930년에는 미국육군 최연소(당시 50세)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35년에는 참모총장을 사퇴하고 다시 소장 계급으로 돌아와 필리핀군 군사고문에 취임했다. 미국은 식민지인 필리핀을 1946년에 독립시키기로 결정한 이상 필리핀군을 창설하고자 했고 이 역할을 필리핀과 인연이 깊은 맥아더가 맡게 되면서 1936년에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필리핀육군 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게 되고, 미국은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1941년 7월에 맥아더를 현역 중장(Lieutenant General)으로 복귀시켰다. 이렇게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과 필리핀군을 통합한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는 12월 8일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파죽지세로 밀어닥치는 일본군의 위세에 밀려 마닐라를 버리고 바탐 반도와 콜레히들 섬으로 퇴각하여 대치했다. 2달간에 걸쳐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한 맥아더는 미국에서 전쟁영웅으로 알려져 신생아에게 더글러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부모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맥아더는 포로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미국 정부는 그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될 경우 국민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하여 오스트리아로 탈출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맥아더의 가장 불명예스런 기록으로 남을 대탈출을 감행하면서 그가 남긴 말은 <I Shall Return>이었다.
패전국 일본의 새로운 현인신(現人神) 맥아더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연합군에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고했다. 일본의 패전과 점령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총사령관으로 떠오른 인물이 필리핀 탈출 이후 맹공격으로 레이테 섬을 공략하여 연합군의 승리를 결정짓는 데 공을 세운 맥아더였다. 당시 맥아더는 미국 국민의 압도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연방회의에서는 맥아더 숭배자가 있을 정도였다. 맥아더는 8월 29일에 오키나와에 도착해서 다음날인 8월 30일 아침에 전용기 “바탐호”로 도쿄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9월 2일에는 일본의 항복조인식을 거행하고, 그 일주일 후인 9월 8일에 막료들을 이끌고 도쿄로 진주했다. 진주군은 40만 명 정도로 연합군 마크를 달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미군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특히 맥아더의 측근은 ‘바탐 보이즈(Bataam Boys 또는 Bataam Gang 이라 함)’라고 불리는 집단이었는데, 그들은 맥아더가 바탐 반도를 탈출할 때 생사를 같이 했던 육군장병 15명으로 구성되었다. ‘바탐 보이즈’는 GHQ 안에 특수한 이너서클을 결성하고 총사령관 주위에 높은 벽을 쌓아 내부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의 특권은 “저 자는 바탐 보이즈다.”라는 한마디로 그 무엇도 초월할 수 있는 면죄부가 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는 열정적으로 점령정책을 시행하고자 했다. 그만큼 그는 권력의 정점에 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이용해야 했다. GHQ는 새로운 지배자 맥아더를 일본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극적인 사건이 필요했고, 일본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인 히로히토 천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1945년 9월 27일에 히로히토 천황이 직접 맥아더를 찾아가 회담을 한 것이다. 인간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온 살아있는 신(현신인)으로 추앙받던 천황이 직접 찾아가 만나야 하는 맥아더가 새로운 신으로 등극한 것이다. 이후 일본 국민들은 맥아더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그 누구를 전쟁범죄자로 기소하더라도, 기소한 전쟁범죄자를 석방하더라도, 일본의 헌법개정안을 내놓을 때도,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 창설을 명령할 때도 일본 국민은 맥아더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맥아더는 일본 국민들 위에 우뚝 선 존재이면서 동시에 편지를 보내면 그것을 읽어주는 친밀한 인물로도 인식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자애로운 독재자’에게 “소망하는 것을 이루게 해주십시오”, “분쟁을 해결해 주세요”, “취직을 부탁드립니다” 등 바램을 써서 보내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3일 후인 6월 28일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국제연합군(UN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된 맥아더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6월 29일에 전용기 ‘바탐호’를 타고 수원으로 날아갔다. 이미 한국군의 사상율이 50%를 넘어 미군이 없으면 한국의 공산화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맥아더는 일본으로 돌아와 미지상군을 본격적으로 투입하는 계획을 본국에 요청하여 미제8군 이외에 투입가능한 전병력 사용허가를 받았다.
맥아더는 즉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육군 제24사단과 제25사단이 방어전을 펼치고 제8군을 한반도로 이동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한반도 정세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상륙작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본국에 설득했고, 7월 25일에 미국 합참의 승인을 받았다. 맥아더는 일본의 사세보(佐世保)에서 7개국 261척의 함대와 함께 인천으로 향했고, 만조가 되어 바닷물이 차는 9월 15일에 월미도에 상륙했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이나 소련이 경고하는 인천상륙작전의 가능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인천주변 경비대는 소규모였으며 덕분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한 부상자는 10여 명에 그쳤다. 그리고 전세를 역전시켜 북한군을 압록강 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자, 그는 원자폭타 사용을 포함한 중국동북부 공습을 주장했지만 부결되고 이로 인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4월 16일 도쿄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귀국길에 20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모여들었다. 일본의 주요 신문은 맥아더에 감사하는 문장을 실었다. 후에 맥아더는 회고록에 이 상황을 “200만 명의 일본인이 길가에 가득 서서 손을 흔들었다”라고 과장해서 썼다. 맥아더는 공항에서 미일양국 요인이 참석한 간단한 환송식을 한 후 전용기 ‘바탐호’를 타고 일본을 떠났다. 맥아더가 귀국한 후에도 일본 정부는 맥아더에게 ‘명예국민’의 호칭을 부여하고 종신국빈에 관한 법률안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도 남아있다. 1957년에 인천자유공원 안에 맥아더 동상을 세운 것이다.
맥아더는 미국에 도착한 후 4월 19일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의회에 참석하여 퇴임연설에서 군가의 후렴구인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후렴구의 의미가 신께서 의무에 대한 깨달음을 주신 바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쓴 노병이 사라진다는 것이라면,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의 시저’라는 별칭으로 불린 사나이가 생각한 의무는 과연 무엇이었을지 또다시 6월이 시작되는 현재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유지아 교수(원광대 HK+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