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1.12.06] 덩샤오핑을 능가하게 된 시진핑의 위상
[2021.12.06] 덩샤오핑을 능가하게 된 시진핑의 위상
한중관계연구원2021-12-06

역사결의(歷史決議)는 장기집권의 보증수표인가

김영신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HK+연구교수

 

지난 11월 8-11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중공) 19기 6중전회에서 중공 백년 역사상 세 번째 역사결의가 통과되었다.중공총서기 시진핑이 마음먹기에 따라 종신 집권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에 분석가들은 세 번째 역사결의는 마치 과거 새 황제가 반포한 등극조서(登極詔書)와 같다고 평하기도 한다.

두 번째 역사결의에서 덩샤오핑은 감히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확정하지 못하였다. 반면 시진핑은 역사결의에서 스스로를 ‘총결자(總結者)’로 자처하였다. 이번 역사결의는 중공에서 차지하는 시진핑의 위치가 이미 덩샤오핑을 능가하고, 마오쩌뚱(毛澤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지난 11월 1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에서 속개된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 6중 전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6중전회는 회의 마지막날인 이날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중공 중앙의 결의'(역사 결의)를 심의·의결하며 시진핑을 마오쩌둥, 덩샤오핑 반열에 올려 놓았다. ⓒ신화통신=연합뉴스

 

 

1차 역사결의는 마오쩌뚱 우상화, 신격화의 시작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라는 제목의 첫 번째 역사결의는 1945년 4월 20일 중공 6기 7중전회에서 통과되었다. 당시 중국은 대일항전을 진행 중이었고, 중공중앙은 여전히 옌안(延安)의 동굴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중공의 가장 중요한 정치활동은 ‘정풍운동(整風運動)’이었다. 제1차 역사결의는 격렬한 당내투쟁인 정풍운동의 총결이자 성과였다.

 

제1차 역사결의의 주지(主旨)는 ‘노선투쟁’이다. 이에 역사결의는 곳곳에서 ‘당을 분열시키고자 획책하였던 트로츠키파의 반혁명행위’, ‘제1차 혁명시기의 일부 투항주의자’ 등의 표현으로 중공의 첫 번째 총서기 천두슈(陳獨秀)를 비판하였다.

 

이어 ‘제1차 좌경맹동(盲動)주의’, ‘제2차 좌경노선’으로 역대 중공 지도자를 비판하였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왕밍(王明)의 ‘제3차 좌경노선’ 비판에 있었다.

 

제1차 역사결의는 마오쩌뚱 동지로 대표되는 정확한 노선만이 진정으로 중국 무산계급 선진분자의 사상을 반영한다. 마오쩌뚱 동지로 대표되는 우리 당과 전국의 광대한 인민의 투쟁방향만이 완전히 정확하다고 총결하였다. 역사결의가 통과됨으로써 ‘마오쩌뚱의 정확한 노선’이 확립되고 마오쩌뚱은 확실한 영도지위를 확보하였다.

 

제1차 역사결의의 가장 주된 목적이자 최대의 작용은 정치투쟁 성과와 마오쩌뚱 신격화운동을 ‘결의화’하였다는 데 있다. 후일 마오쩌뚱이 이끄는 중공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마오쩌뚱은 ‘신과 같은 존재’로써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중공 발전노선 변화의 전환점인 제2차 역사결의

 

제1차 역사결의가 마오쩌뚱 ‘신격화’의 기초 작업이었다면, 제2차 역사결의는 마오쩌뚱을 ‘신단(神壇)에서 끌어내리는’ 의미가 강하였다. 제2차 역사결의는 1981년 6월 27일 중공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말한다.

 

이때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지 채 5년이 되지 않은 시기였다. 이 무렵 마오쩌뚱이 지목한 후계자인 화궈펑(華國鋒)은 “우리는 마오 주석의 모든 결정을 따라야 한다. 마오 주석의 모든 지시는 시종 준수해야 한다”는 좌경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우호세력과 연합하여 화궈펑과 투쟁하는 와중에 열린 중공 11기 3중전회는 개혁개방을 결정하여 정국이 격하게 요동쳤다. 중공과 전국 인민이 도대체 화궈펑과 덩샤오핑 양자 중 누구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사회전체가 정체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에 사상을 통일하여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마오쩌뚱 추종파의 부활을 차단하기 위해, 덩샤오핑과 그의 지지자들은 역사결의를 내놓기로 결정하였다.

 

제2차 역사결의는 매우 신중하게 집필된 문건이다.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고, 4인방의 잘못된 노선을 비판하는 일은 지뢰를 제거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만에 하나라도 마오쩌뚱이라는 ‘신주(神主)’를 손상시키기라도 한다면, 당내외에 상존한 마오쩌뚱 추종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따라서 제2차 역사결의는 건국 이전 중공의 역사를 온전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건국 이후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성과도 기본적으로 긍정하였다. 마오쩌뚱에 대해서도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로 존숭의 뜻을 표하고, 그의 일생은 ‘공적은 첫 번째’라고 정면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면서도 매우 조심스럽게 ‘잘못은 두 번째’, ‘말년에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부정적 평가도 덧붙였다.

 

제1차 역사결의와 비교할 때 제2차 역사결의의 가장 큰 특징은 당권자(當權者)의 당내 지위와 지도이념을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1차 역사결의에는 마오쩌뚱의 이름이 51차례 언급되었다. 그때마다 ‘영수, 영도, 정확’ 등 수식어가 따른다.

 

제2차 역사결의에 덩샤오핑의 이름은 총 9차례 등장할 뿐이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지위와 지도이념이 역사결의에서 부각되지 않도록 주의하였던 것이다.

 

제2차 역사결의도 일정부분 노선투쟁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급투쟁 위주로 전개되었던 중공의 정치운동노선을 마무리하고, 경제건설 중심의 발전노선으로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공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빠진 제3차 역사결의

 

제1·2차 역사결의는 공히 과거 특정시기 중공의 잘못된 정치노선을 부정하였다. 이와는 달리 이번 역사결의는 ‘역사경험’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써 과거 역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번 역사결의에는 당의 ‘위대, 영광, 정확’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과오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중공의 장기집권에 대한 합법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인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시진핑을 완전무결한 지도자로 평가한 것은 장기집권의 합리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스럽게 중공의 과거를 잇고 미래를 이끌어갈 책임이 시진핑에게 귀결됨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이다.

 

회의 후 발표된 공보(公報)는 중공 백년의 역사를 신민주주의혁명시기,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시기,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신시기의 네 단계로 구분하였다.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신시기 항목에서는 덩샤오핑,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집정시기의 공적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반면 ’18기 전국대표대회 이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는 신시대에 접어들었다’는 표제로 시진핑 집권 9년간의 성취를 대대적으로 조명하였다. 공보는 시진핑 사상은 당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21세기의 마르크스주의, 중화문화와 중국정신의 시대정화(精華)로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의 새로운 비약을 실현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중공이 또 다시 꺼낸 개인숭배의 낡은 병풍

 

시진핑시대의 중공은 재차 개인숭배의 낡은 병풍을 꺼내들고 있다. 2017년 ‘시진핑사상’이 헌법에 명시되었고, 다음해에는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을 폐지하였다. 내년으로 예정된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중공은 목하 시진핑에 대한 개인숭배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 트럼프가 우스갯소리로 “미국도 중국을 따라 영도자의 임기 제한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한다. 미국은 그나마 최고지도자를 감독하고 견제할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사법권도 독립되어 있지 않고 민주선거와 언론의 자유마저 없는 나라에서는 권력자의 장기집권 야욕과 개인숭배를 제어할 방법이 없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120215075319629#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