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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7] 중국 근대 농업의 개척자, 유자명
[2021.12.17] 중국 근대 농업의 개척자, 유자명
한중관계연구원2021-12-20

 진정한 국제우인(國際友人), 유자명

한국독립운동가의 직업군은 다양하다. 그 가운데 농학자로서 중국 근대 농업에 큰 영향을 미친 독립운동가로 유자명을 들 수 있다. 그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는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 아나키스트이자 한중공동항일투쟁의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농업분야에서 그의 탁월한 업적은 독립운동이라는 빛에 가려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몇 해전 유자명을 중국의 한 대학에서 기억하고 그를 기리는 기념관도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에 소재한 호남농업대학 캠퍼스가 바로 그 장소이다.

 

2014년 8월 뜨거운 어느 날 호남농업대학을 방문했다. 유자명의 아들 유전휘(柳展輝) 교수가 마중 나와 있었다. 유전휘는 지금 호남농업대학교 관계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서 일행을 대외협력처 회의실로 안내했다. 간략한 간담회를 통해 학교 관계자는 “유자명 선생 전시관을 보다 확장해서 후대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유전휘 교수의 안내로 유자명 전시관으로 향했다. 2013년 유자명의 제자들이 성금을 모금하여 호남대학 근무 당시 거주했던 집에 전시관을 만들었는데 총 5개의 부분으로 전시물이 구성되어 있었다. 장사시 문물보호단위(문화재)로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모국의 학자를 맞아 주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호남농업대학 내에 설치된 유자명 동상을 촬영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 동상도 2013년에 세워졌다. 호남대학 제2교학관과 제3교학관 사이의 공터에 세워진 동상에는 “한국의 국제적 전우이며,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난 호남농업대학 교수이며 저명한 원예학자이자 독립운동가”라고 새겨져 있다. 다만 충주는 중주라고 잘못 각자되어 있다. 타국에서 농업인으로 후반생을 마감했던 위대한 국제적 인물 유자명은 그렇게 호남농업대학에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고 있었다. 유전휘 교수가 호남농업대학교에서 한국인 방문단에게 조촐한 점심 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흔쾌히 응했다. 학교 내 구내 식당에 마련된 자리에는 아주 특별한 포도주가 있었다. 바로 유자명이 개발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였다.

 

▲ 후난농업대학 내에 설치된 유자명 전시관 ⓒ김주용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 참여하다

 

유자명은 1894년 정월 동학농민혁명의 기운이 한반도 남부를 뒤덮을 때 충북 충주군 이안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한문공부로 보냈다. 1912년 그는 경기도 수원에 자리한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1916년 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충추간이농업학교에 배치되어 교무주임으로 3년 동안 농업을 가르쳤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조소앙의 권유로 조용주가 결성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주축이 되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결성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때 단재 신채호를 만나게 되었다.

 

유자명은 신채호의 애국연설회에 참석하여 한국 역사에 대한 강연을 듣고 그를 따르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그의 <회억록>에 기록할 정도였다. 하지만 외교론이 유약하다고 판단한 유자명은 1919년 12월 귀국하였다.

 

아나키즘으로 한중연대를 모색하다

 

유자명으 1920년 초부터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새로운 사조를 통한 독립운동 방략 수립에 골몰했다. 특히 일본무정부주의자들의 검거 선풍이 불면서 유자명은 아나키즘 서적을 탐독했다.

 

그는 1921년 임시정부의 자료를 이륭양행을 통해서 국내로 반입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것이 발각되어 3월 경성고등경찰에게 검거됐다. 다행히 한 달 만에 풀려난 유자명은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것이 한반도와는 공간적으로 마지막 인연이었다. 그는 60여 년간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영영 귀국하지 못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유자명은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성환에게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텐진에서 영어를 배울 때 우당 이회영 집에 기거하기도 했다. 유자명은 이때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상하이에서 신채호에게 조선혁명선언을 쓰도록 권유한 것도 그다.

 

유자명은 이때부터 한국의 아나키스트였던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정화암 등과 교류했고 베이징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들은 잡지 <정의공보>를 발간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9호까지만 발행하고 휴간됐다.

 

유자명은 크로포트킨의 호상부조론(互相扶助論 , Mutual Aid)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 이론이 전쟁을 억제하는 데 유용하다고 인식했다. 특히 크로포트킨의 자선전 “한 혁명자의 회억록”이 유자명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자서전 역시 크로포트킨과 같은 제목이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자명은 아나키즘에 대한 정의를 “정치권력이나 강제를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이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하고 이를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개념은 한인 아나키스트가 수용한 개념으로 이민족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차용됐다.

 

1927년 유자명은 의열단과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구성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우한(武漢)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중국 경찰과 일본 경찰에 의해 공산주의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고 6개월 수형생활 끝에 풀려났다. 유자명은 이 시기 단재 신채호가 타이완 지롱(基隆)항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괴로워했다.

 

우한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1929년 유자명은 아나키스트들의 활동 근거지였던 푸젠성(福建省) 첸저우(泉州) 여명중학교에서 생물학 교사로 활동했다. 이때 첸저우에는 유자명을 비롯하여 정화암, 유기석 등이 화동했다.

 

유자명은 한 학기를 가르친 후 상해 입달학원으로 갔다. 이곳에서 유자명은 중국 아나키스트와 연합하여 한중공동투쟁을 전개하는데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의 문호 바진(巴金)도 이 때부터 만났다.

 

사실 바진은 1925년 북경대학 입학을 치를 때 유기석과 심여추를 만났다. 바진은 한인 아나키스트와의 교류를 통해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국적을 초월할 수 있음을 인식했다. 유자명과의 교류역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36년 바진은 유자명의 모발이 갑자기 백발이 되었음을 알고 그를 주제로 한 소설 「머리칼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가 남긴 유산, 공생

 

유자명은 자신의 농업에 관한 관심을 끊임없이 표출했으며, 상해 입달학원에서의 교원생활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입달학원을 통해 배출한 중국인 제자들과의 관계, 중국인 아나키스트와의 교류를 통해 유자명은 꾸이린(桂林)에서 새로운 농업 기술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 후난농업대학 내에 설치된 유자명 동상 ⓒ김주용

1941년 12월 말 꾸이린에 도착한 유자명은 꾸이린 외곽에 위치한 잠경촌에 영조농장을 건설하여 귤, 옥수수를 재배하였으며, 약 1년 반 동안 영조농장 업무를 관장했다.

 

꾸이린시에서 승용차로 약 4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잠경촌이 있다. 잠경촌은 백씨 집성촌으로서 마을입구 이슬람교 사원 청진사(淸鎭寺) 옆에 백씨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사당은 약 100년 전에 세워졌으며 현재 보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다.

 

잠경촌에서 남동쪽으로 약 5분 정도 비포장길을 달리면 넓은 터가 나오는 데 바로 그곳에 영조농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수만평 정도의 농장 규모에 당시에는 사무실과 식당, 숙소 등이 있었으며, 100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당시 농장입구에 영조농장 팻말이 있었으며 타원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재도 영조농장을 둘러싼 곳에 귤나무가 남아 있다.

 

유자명은 1944년 4월 임시정부 제5차 개헌에 앞서 조소앙 등과 7인 헌법기초위원을 맡아 일하였는데 이 때를 제외하고는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기 보다 작전의 배후 참모로서의 역할을 했다. 해방 후 유자명은 1950년 귀국을 결심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중국의 호남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농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중국 생활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역시 중국공산당에서 혹독한 사상 검증을 받았다.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한 한인 아나키스트가 아닌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구시대 구사회의 지식인이자 조선 사람이었던 그에게 사상 개조는 문화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더 강하게 요구됐다.

 

유자명은 농학자로서 자신의 여생을 중국 농업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90 평생이 한국과 중국의 항일투쟁의 연대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적 사명과 염원을 담은 진정한 평화시대 마중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121611103845967#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