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경은 이명선, 김성칠보다 앞 세대의 인물로 분류될 수 있다. 제국대학출신도 아니었던 그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초기 한·중 학술교류에 있어서 그가 보여준 남다른 업적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울의 도서관 사서가 베이징대학에서 강의하기까지
김구경은 경주출생이다. 1920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교토(京都)에 있는 진종대곡파대곡대학(真宗派大谷大學)에 입학하여 지나문학과(오늘날의 중국문학과)에 진학한다.
당시 김구경의 경제적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23년 재교토 고학생회(苦學生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좋지 못한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주경야독을 착실히 이어나가 1927년에 졸업하게 된다.
그는 졸업하고 귀국하여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의 교사가 된다. 고향이 경주, 학교는 서울, 대학교는 일본에서 졸업하고 직장은 개성에 얻게 된 것이다. 장거리 이동이 편리해지고 보편화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소위 ‘역마살’이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1927년부터 그는 서울에 있는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서 사서관(司書官)으로 근무하게 된다. 때마침 중국인 교환교수로 와 있던 북경대학의 웨이젠공(魏建功, 1901-1980)과 인연이 싹트게 된다.
김구경은 일본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했기에, 한중일 3국어에 능통했다. 웨이젠공은 김구경에게 한국어와 일본어를 배웠다. 웨이젠공은 당시 베이징도서관에 소장할 한국의 서적을 수집하는 업무도 수행하고 있었다. 김구경의 도움을 받아 수백여 권의 서적을 수득할 수 있었다.
1928년 8월 북경으로 돌아간 웨이젠공은 당시 배이징대학 교수였던 저우줘런(周作人, 1885-1967)에게 김구경을 소개하게 된다. 저우줘런은 베이징대학에 일본과 한국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동방문학계(東方文學係)를 설립하고 유지하는데 고심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일문을 담당할 인원으로 김구경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구경은 경성제국대학 사서관을 그만두고 베이징으로 건너가, 1929년 가을학기부터 베이징대학에서 ‘중·일·한 자음 연원연구'(中日韓字音淵源硏究), ‘일문'(日文) 등의 강의를 맡게 됐다.
중국 국고정리운동의 주역 후스와의 학문적 교류
1920년대 중국의 신문화운동, 그리고 국고정리운동을 주도한 후스(胡適, 1891-1962)는 <중국철학사대강>(中國哲學史大綱)이라는 저술로 당대 중국철학의 1인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1928년 상하이 중국공학(中國公學) 교장으로 있다가 1931년 1월 9일부로 다시 베이징대학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김구경은 후스를 방문하여 자신의 대학시절 은사인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가 보내온 저작 <능가연구>(楞伽硏究)의 비평을 요청한다. 두 사람의 경전해석에 대한 이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김구경은 원본확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스승 스즈키 다이세츠 본, 그리고 후스가 가지고 있던 둔황(燉煌) 사본의 런던 본, 파리본을 두고 교감하여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의 정본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두 판본의 차이를 세심하게 변별하는 한편, 판독이나 해석의 문제가 있는 지점에는 각각 중국과 일본의 권위자인 스즈키 다이세츠, 후스와 논의를 하며 점차 완성도를 높여 나간다.
마침내, 1932년 3월 교간본 <능가사자기>가 간행될 수 있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소장 <능가사자기>에는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드림(京城帝國大學圖書館 惠存)”, “담설구경(擔雪九經)”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어 그가 자신이 재직했던 도서관에 보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진위푸(金毓黻)의 방한과 한중학문교류
김구경은 1932년부터는 만주지역의 펑톈(奉天, 오늘날의 선양)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군벌들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베이징을 떠나 비교적 안정된 북방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김구경은 당시 만주국립봉천도서관 부관장이었던 진위푸(金毓黻, 1887-1962)의 비서로 배속된다. 진위푸는 중국 동북지역 역사학에 있어서 처음으로 지역사의 관점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저작으로 <발해국지장편> 같은 것이 있다.
1932년 10월, 진위푸는 서울을 방문하게 된다. 이때 비서 김구경이 함께 하게 된다. 이들 일행은 10월 16일 오후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이나바 이와키치(稲葉 岩吉, 1876-1940), 토리야마 키이치(鳥山喜一, 1887-1959), 후지츠카 린(藤塚隣, 1879-1948) 등을 만났다.
이나바 이와키치와 토리야마 키이치 모두 만주지역의 전문가였다. 특히 토리야마 키이치는 발해국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만주답사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지츠카 린은 당대 만권장서로 이름이 났던 만큼, 방문의 성격이 만주지역 연구자 및 자료수집에 있었던 것이 잘 드러난다.
이들은 10월 19일 장서가로 이름난 최남선, 그리고 당대 가장 이름이 알려졌던 소장학자 김태준을 만나게 된다.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학자들답게 주로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에 대한 정보, 또 책에 대한 정보들이 주를 이루었다. 진위푸는 <발해세가>(홍석주), <병자록>(나만갑)에 대한 정보를 얻어 자신의 <발해국지장편>의 주요한 참고문헌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들은 만남 이후에 서로 우편을 통해 다양한 저작들을 주고받았다. 한국에서 중국으로는 <용비어천가>, <대한강역고> 등이 건너갔고, 중국에서 한국으로는 동북지역의 역사를 다룬 <심고>(瀋故)등이 전해오게 된다.
삼학사 스러져 간 심양에서 간행되는 삼학사전(三學士傳)
김구경은 한중일 교류에 있어서의 중간역할 뿐만 아니라, 학문의 기초를 다지는 다양한 자료의 간행작업들도 병행해나갔다. <언문지(諺文誌)>(유희), <훈민정음운해>(신경준), <난양록(灤陽錄)>(유득공) 등을 출간하였다. 이 중 앞의 두 가지는 한글과 관련된 1차 자료이다. 유득공의 <난양록>은 1790년과 1801년의 연행에 대한 기록으로, 한중교류의 역사적 기원을 다루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이 1935년 그가 간행한 <삼학사전(三學士傳)>이다. 삼학사는 병자호란기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결국 중국 심양에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洪翼漢, 1609~1637), 윤집(尹集, 1606~1637), 오달제(吳達濟, 1609~1637) 3인을 말한다.
조선후기 노론의 영수이자 북벌론의 선봉장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그들의 행적과 언론을 모아 편찬한 것이 <삼학사전>이다.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관에 머물렀기에, 심양에서 <삼학사전>이 다시금 간행되는 것은 여러모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후 김구경은 1940년 봉천농업대 교수, 41년에는 만주국 국립중앙도서관 주비처 사서관 등을 거쳤다.
해방, 전쟁, 그리고 흩어짐과 잊혀짐
해방 후 김구경은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교편을 잡는다. 그의 경력과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고려해볼 때,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아우르는 폭넓은 시각의 연구, 그리고 학문적 교류의 활성화가 기대됐다.
하지만 해방 후 곧바로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그의 학문적 실천은 고국에서 본격적인 실현을 맞이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중문과 교수 이명선이 부정적이지만, 그래도 그 모습의 일부를 엿볼 수 있을 정도의 서술이 남아 있는 것에 반해, 김구경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남아 있지 못하다는 것도 안타까움을 더한다. 최근 산동대학의 김철(金哲)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의 홍석표 교수 등의 연구에 의해 그의 면모가 점차 밝혀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