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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2.02.11]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한복보다 더 문제됐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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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2-02-11

위구르족(Uygur)의 과거와 현재

김영신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시작 전부터 삐걱거린 베이징 동계올림픽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보는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이 편치 않다. 개막식 행사에 한복(韓服) 차림의 여성이 등장하면서 심기를 불편하게 하더니, 주최국에 유리하게 작용한 편파적 판정 등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실 이번 동계올림픽은 미국 등 서방 국가의 문제 제기로 시작 전부터 삐걱대는 모습을 보였다. 위구르족의 인권침해를 이유로 미국 등이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대로이다. 서방에 반격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중국은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위구르족 스키선수를 내세웠다.

 

▲ 지난 4일(현지 시각) 중국 베이징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최종 성화 주자인 디니걸 이라무장(왼쪽)과 자오자원이 성화대에 성화봉을 꽂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위구르족의 현재

 

2020년 11월 실시된 인구센서스 결과에 따르면 중국 경내 거주 위구르족은 11,774,538명이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

 

위구르족은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톈산산맥(天山山脈) 이남, 타림분지(塔里木盆地) 주위의 오아시스가 위구르족의 집거중심이다. 중국 내지의 후난성(湖南省) 타오위안현(桃源縣)과 허난성(河南省) 민츠현(澠池縣)에도 소수의 위구르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몽골제국(원) 시기에 중원으로 이주한 이들의 후손이다.

 

위구르족 명칭의 의미와 변화

 

위구르는 민족 자칭으로 ‘단결’, ‘연합’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한자로 기록된 사서에는 시기에 따라 위구르족의 이름이 각기 다르게 등장한다. 기원전에는 정령(丁零) 혹은 정령(丁令)으로 기록되었다. 서기 4세기의 문헌에는 원흘(袁紇), 6-7세기에는 위흘(韋紇)로 기록되었다.

 

788년 이전에는 회흘(回紇), 788년 이후부터 1270년 까지는 회골(回鶻), 1270년 이후 1640년대 까지는 외올아(畏兀兒)로 표시되었다. 1935년 이후부터는 웨이우얼(維吾爾)로 표기되는데, 이는 외올아의 음역이다.

 

위구르족의 등장

 

위구르족은 수 천년 전부터 역사무대에 등장한 유구한 전통을 가진 민족이다. 그들의 족원(族源)은 기원전 3세기 무렵 바이칼호 이남, 몽골초원 사이의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정령에서 찾을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위구르족은 기원 전후 무렵 북방의 최강자였던 흉노와 혈연관계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기 4세기 이후 정령은 철륵(鐵勒), 철력(鐵曆), 적륵(赤勒)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는 서쪽으로는 볼가강에서 동쪽으로는 흥안령(興安嶺)에 이르는 동서로 만여 리에 달하는 광범한 유라시아 북부초원에서 생활하였다.

 

6세기 중엽 이후 위구르족의 조상들은 몽골초원 전체와 현 신장의 서북부인 준가르분지(准噶爾盆地)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는 돌궐칸국(突厥汗國)의 지배를 받았다.

 

돌궐귀족들의 잔혹한 통치가 이어지자 위흘(韋紇) 등 비교적 큰 9개 부락이 연맹을 결성하여 반항하였다. 이들은 744년 돌궐칸국을 무너트리고 막북회흘칸국(漠北回紇汗國)을 건립했다. 이때부터 회흘(回紇)이라는 민족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을 구원한 위구르

 

회흘칸국과 당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였다. 회흘의 역대 칸은 모두 당의 책봉을 받았다. 그렇다고 회흘이 당의 속국이거나 지방정권은 아니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 당의 책봉을 받았으나 독립왕국으로 존재하였던 발해(渤海)의 역사와 흡사한 면을 보여준다.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기, 회흘은 두 차례 중국 내지에 출병하여 위기에 처한 당을 돕기도 하였다. 788년 회흘의 칸은 당에 국서를 보내 ‘송골매가 공중을 선회하는 날렵함’을 본따 회골(回鶻)로 이름을 바꾸겠노라 청했다.

 

전성기를 지나 쇠락기로

 

840년 회골은 힐알사(黠戛斯, 키르키스족)에게 패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대부분은 서역으로 이주하여 현재 위구르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정착하였다. 9세기 말, 회골인들은 고창회골왕국(高昌回鶻王國)을 건립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0세기 중엽에는 주변의 여러 민족과 연합하여 강대한 카라한왕조(喀喇汗王朝, Qara Khanid)를 건립하였다. 극성시기 최대판도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타지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남부 및 신장 중서부까지 포함하였다.

 

12세기 초부터 회골은 서요(西遼)라 불린 거란인 정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서요 말기 몽골이 점차 강성하여지자 회골은 몽골에 복속하여 서요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결국 서요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강제적 중국 편입

 

신장 일대 이슬람교가 종파싸움에 휩싸여 있던 1678년, 신장 북부 준가르칸국(准噶爾汗國)의 갈단칸(噶爾丹汗)이 위구르인 수령의 인도하에 부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신장 남부에 정교합일적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이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건륭제(乾隆帝)는 1757년 준가르, 1759년에는 신장 남부를 평정했다. 이로써 위구르족은 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에 맞선 위구르족의 무장투쟁이 19세기 초엽까지 지속되었다.

 

19세기 중엽 중국 내지가 혼돈상태에 빠져 들고 서남과 서북지역에서도 기의가 연달아 발생하였다. 그 영향으로 1864년 신장에서도 위구르족이 주축이 된 반청 농민기의가 폭발하였다.

 

1884년, 반란을 평정한 청은 위구르족 거주지역을 성으로 승격시키고 ‘새로운 영토’라는 의미의 신장(新疆)으로 명명하였다. 이후 신장과 내지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면서 위구르인의 위치도 전과는 달라지게 되었다.

 

여타 소수민족과는 다른 위구르족의 역사

 

중국에는 55개 법정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각 민족의 역사연원, 중국의 일원이 된 경로는 각기 다르다. 윈난(雲南)과 꾸이저우(貴州) 등 서남지역 거주 소수민족은 기원전부터 중국 역대 왕조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아 왔다. 조선족처럼 살길을 찾아 스스로 중국땅에 발을 디딘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소수민족과는 달리 위구르족은 과거 강력한 독립왕국을 건설하고 독자적인 역사발전의 경험을 가진 민족이다. 그들의 오랜 삶의 터전은 청대 중엽 이후 중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에 위구르족은 19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30년대에는 공개적으로 독립 쟁취를 민족목표로 삼기도 하였다.

 

위구르족은 보편적으로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신장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키르키스스탄,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모두 이슬람국가다.

 

오랫동안 독립을 갈구하였던 위구르족의 반항의 역사에 더하여, 이슬람국가와의 접촉이 쉽다는 점에 중국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위구르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한 것이 현재의 위구르 문제를 촉발시킨 원인이라 하겠다.

 

서방에서 제기하고 있는 ‘인권문제’와 관련한 사안들이 사실인지 여부를 떠나, 위구르족이 화제에 오르는 것 자체가 중국으로서는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