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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1] 관동군과 만주국의 ‘밀정’ 만들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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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2-02-21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밀정이 공동체 파괴했던 역사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김주용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영화 <밀정> 첫 장면에는 김상옥(김장옥)이 등장한다. 군자금 모집과 의열단 입단 후의 활동이 겹쳐진 장면이다. 김상옥이 변호사 박승빈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했지만 약속과 달리 처음에는 군자금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적절하게 안배한 것 같다.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운동은 1920년 3월부터 개시됐다. 첫 번째 암살파괴운동이었던 이른바 ‘밀양폭탄의거’로 의열단원 곽재기, 이성우, 한봉근, 김기득, 신철휴 등이 체포됐다. 폭탄의거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소설가 박태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첫째는 무기를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고 국외에서 수송하는 까닭이다. 본래 적의 국경 경계는 심히 엄밀하여, 단신으로 출입이 극난하거든 하물며 무기, 탄약의 운반에 있어서랴. 이것이 난사(難事) 중의 지난사(至難事)이다. 둘째는 운동자금의 부족이라. 이러한 운동은 원래 일정한 예산을 세울 수 없는 것으로, 사정은 찰나간에 방침을 변하는 수가 있게 되고, 행동은 극도로 민활을 요하여 자연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일이건만, 우리에게는 항상 그 준비가 부족한 일 등이다.”
의열단의 부산경찰서 폭탄의거, 밀양경찰서 폭탄의거의 성공 뒤인 1921년 봄 김원봉은 김대지 스승에게서 밀서를 받고 비밀장소로 가서 김상옥을 만났다. 김상옥(1889∼1923)은 김원봉 보다 9살 연상이었다.
소년 노동자에서 청년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김상옥은 의열단에 입단하기 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 가운데 한명이었던 조소앙을 만났다. 그후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으면서 국내에 군자금을 모금하려고 잠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2년 11월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들어갔다.
이 때 김상옥은 비단장사들이 지고 다니는 상자를 만들었다. 그 통을 메고 11월 14일 상해 부두를 출발하여 천진으로 향했다. 어렵게 경성에 도착한 김상옥은 어머니를 찾았다. 김상옥은 암살단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생사가 위태로움을 직감했다. 김상옥은 영화 <밀정> 처럼 경기도 경찰국 소속 경찰들 1500명과 대치하였다. 그리고 동상으로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잘려나간 상태에서도 조국 독립을 위해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 영화 <밀정> 포스터
밀정(스파이)이란
밀정(스파이)은 은밀하게 상대방의 비밀을 볼 수 있는 인물이며 하나의 정부에 속하여 다른 정부의 비밀정보, 특히 군사 관계의 그것을 입수하는 자를 일컫는다. 어느 세력, 사회집단이 반대 세력, 집단에 대한 정보, 특히 그 내부사정 및 내부의 동향을 알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자가 스파이이다.
또 국제정치의 무대 이면에서 비밀정보를 수집하여 암약하는 스파이의 존재는 소설 및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고 또 실제로 자주 뉴스거리가 되곤 하였다. ‘007시리즈’는 대표적인 스파이 영화이며, 그 아류들도 쏟아져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은 불사조처럼 끈질긴 생명력과 정의감(?)으로 무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밀정은 긍정적 존재가 아니며, 공동체의 안위를 손상시키는 위태로운 존재다.
스파이의 공통점은 비밀성이다. 목적은 상대방의 비밀정보를 손에 넣는 것이다. 스파이에도 여러 가지 담당 분야가 있는데, 제국주의 일본의 밀정 계통도는 정보장관, 정보관, 첩보원, 첩자, 밀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보관은 첩보원의 지배자, 조정자, 수집자이며, 첩보원은 현장의 스파이(첩자, 밀정)를 스카우트하여 훈련시키고 정보수집을 명령한다. 게다가 이러한 정보 기관에서는 정보 제공자 및 밀고자가 있으며, 정보관 및 첩보원에게 정보를 넘겨준다.
관동군과 밀정
제국주의 일본은 대륙침략을 추진하면서 현지 정보수집과 항일세력에 대한 감시 기능을 담당하는 특무기관을 조직하였다. 1910년대 만주지역에서 일본제국주의 특무는 ‘하얼빈 특무’가 대표적이다. 1918년 하얼빈 특무가 관용어로 사용될 정도로 관동군의 밀정 배출 시스템은 공고하였다.
제국 일본이 국제도시로 발전하고 있던 하얼빈에 주목하였던 이유는 백계러시아인과 연해주 지역 이주한인들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1920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했던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일러학원(후일 국립 하얼빈학원)을 설립하여 스파이 배출의 요람으로 만들었듯이, 하얼빈은 한마디로 밀정의 도시였다.
밀정 활용은 비단 관동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외무성에서도 밀정들을 활용하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산하 ‘소독단’이 밀정 색출을 위한 특수조직으로 활동한 사례를 보더라도 제국주의 일본의 밀정 배출은 동북아 전체에서 이루어졌다. 그만큼 밀정은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단체에게는 위협 그 자체였다.
한인 밀정에 대한 오해와 진실 속에서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밀정으로 처단된 경우도 있다. 임시정부의 지도자 김구는 지속적인 밀정의 암살 시도를 받아야 했다. 이렇듯 중국 관내의 밀정들의 활동 보다도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은 만주지역의 밀정들이다.
올해는 일본 관동군의 나라 만주국이 성립된 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관동군의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만주국은 건국 이념을 협화로 내세우면서 그 반대세력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기술을 선보였다. 관동군과 만주국은 반만항일(反滿抗日)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귀순공작 특무부대를 조직하였으며, 최남선과 윤상필, 박석윤 등은 특별공작대를 돕는 후원회를 결성했다. 이처럼 관동군과 만주국에서는 특무 부대를 운영함으로써 동북항일연군 등 항일세력의 예봉을 꺾고 치안숙정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밀정은 비밀정보원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업무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만주지역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특무 및 밀정 조직 운영은 러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러일전쟁기 일본헌병사령부는 만주파견군 제3병참 관리부에 배속된 헌병에게 특무 임무를 부여하였다. 따렌(大連) 및 각지의 일본군 가운데 정보수집과 군사경찰의 임무를 담당했다. 1906년 정식으로 성립된 관동군헌병대는 일본헌병대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본부는 뤼순(旅順)에 두었다.
1931년 이른바 ‘만주사변(9.18사변)’이 발발하고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중국 동북지역의 통치가 장기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관동군 병력도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관동헌병대 역시 확대되었다. 만주사변 3일 뒤 관동헌병대 사령부가 성립되었으며 헌병대 최고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사령부는 뤼순에서 선양(沈陽)으로 이전하였으며, 다시 1932년 10월 28일 선양에서 신징(新京, 이전 장춘)으로 이전하였다.
관동헌병대사령부는 관동군사령부 직속이다. 관동군 참모장이 이끌었다. 관동헌병사령관은 동북지역 헌병대를 조직하고 감독하는데 관동군 경무부장이 겸직하였다. 사령부는 총무부와 경비대로 이루어져 있다. 총무부에는 소장 1명이 부장을 맡으며, 대좌급 군관이 사령관을 보좌한다. 각 헌병대 대장과 경무부장을 지휘할 권한을 가진다. 부서 내에는 서무과를 설치하며, 제1과, 경리과를 두며, 경무부에는 부장 1인이 있다.
관동헌병사령부 예하에는 헌병대, 헌병분대, 헌병분견대, 분주소, 헌병실을 두었으며, 만주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파시스트 통치망의 구축인 셈이다.
만주사변 전에는 헌병대 예하에 헌병 분대 7개소, 헌병분견대 9개소가 있었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대륙침략에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헌병분대 등을 빠르게 신설하였다. 1941년 8월 20일 기준 18개의 헌병본대가 있었으며, 헌병분대는 105개소, 헌병분견대는 61개소에 달했다. 이외에도 3곳에 야전헌병대를 두었으며, 헌병총인원은 3,849명이었다.
1945년 7월 소련의 동진에 대비하기 위해 관동헌병사령부에 헌병대와 특무기관을 아우르는 특별경비대가 신설되었으며, 장춘, 심양, 하얼빈, 치치하얼, 대련, 금주, 목단강, 흥안성, 사평 등지에 헌병대와 1개 교련대를 두었다. 이러한 특무조직에서 운영했던 밀정들의 활동상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밀정들이 남긴 유산(?)
관동군 헌병대 밀정들은 이주 한인사회의 실생활과 깊숙하게 연관된 직업을 선택하였다. 수의사, 원동기 수리공 등 생활밀착형 직업을 가진 밀정들은 한인들과의 거리를 줄였으며, 신뢰도를 높여 갔다. 이들의 활동에는 당연히 활동비 즉 기밀비가 충분히 지급됐다.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독립운동 또는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는 세력을 탄압하고 일소하기 위해 아주 효율적인 방법 즉 밀정들의 현지화와 현지인의 밀정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심지어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밀정으로 활동한 예도 적지 않게 있다.
제국주의 일본의 밀정 만들기 속에서 제국주의시대 국가의 경계를 넘어 활동했던 밀정들은 각 지역 내에서 심각한 현실문제의 상호 모순을 야기했으며, 그러한 갈등의 현상은 오늘날에도 여진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에서 만주국의 존재를 부정하여 가짜 괴뢰 만주국이라는 의미로 ‘위만주국(僞滿洲國)’으로 사용하고 있음은 치욕과 오욕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함이며, 한편으로 민족간의 격차와 분열의 공간이었음을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3년 뒤 광복 80주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밀정관련 자료집이 출간되지 못하고 있다. 갈등과 소진의 시대를 대표하는 밀정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도 밀정자료집이 세상이 빛을 보아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과의 싸움뿐만 아니라 밀정들의 파괴공작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들에 대한 후대들의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며 그 가운데 실행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밀정 자료집의 발간이라고 여겨진다. 밀정 한 명이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 있었던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