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2.04.08.] 만리장성 동쪽 끝이 평양? 만리장성은 고무줄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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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2-05-02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평양?김영신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단둥(丹東)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한 국경도시인지라 북한 관련 뉴스에 종종 등장한다. 이곳에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輯安)으로 가는 길, 단둥 시내에서 십 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야트막한 산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을 지나치게 된다. 호산산성(虎山山城)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처음 이 산성을 찾은 적이 있다. 성문 옆에는 이 산성이 여진족을 막기 위해 명나라 때 세워졌다는 안내판이 있었다.
몇 년 전 다시 이곳을 찾았다. 안내판은 이전과 같은 장소에 있었다. 안내판의 문구는 이곳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바뀌어 있었다. ‘동북공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날조도 모자랐던지 근자에는 만리장성의 시작점이 평양이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만리장성은 장성 이어 붙이기의 결과물
장성은 고대 중국의 여러 시기, 여러 나라에서 북방의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한 대규모 군사시설의 통칭이다. 지금과는 달리 중국이 여러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던 시기, 북쪽과 서쪽 변방에 위치한 제후국들은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변경에 성을 쌓았다. 여러 제후국이 자국 국경을 따라 쌓은 성은 당연히 길이가 짧았다.
당시 중국의 가장 동북에 자리한 연(燕)나라는 동호(東胡), 곧 ‘동쪽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금의 베이징 부근에서 시작하여 네이멍구(內蒙古)까지 이어지는 성을 쌓았다. 연나라의 장성은 동호 외에도 ‘조선(朝鮮)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당시 고조선이 연나라를 위협할 정도의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가장 북방에 자리한 조(趙)나라 역시 장성을 쌓았다. 북방의 강자인 유목민족 흉노(匈奴)를 막기 위해서였다. 네이멍구 빠오터우(包頭) 등지에는 지금도 조나라가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의 가장 서쪽에 자리한 진(秦)나라도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서융(西戎)이라 불린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현재의 깐수성(甘肅省) 린타오(臨洮)에서 시작하여 황허(黃河)까지 이르는 변경에 흙을 쌓아 성을 만들었다.
변방에 자리한 제후국들만 성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나라 간의 전쟁이 빈번했던 전국시기, 내지에 자리한 위(魏)나라는 강국으로 부상한 서쪽 진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화산(華山) 북쪽에서 시작하여 황허에 이르기까지 국경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 쌓아진 이상의 성들과 관련한 역사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흔적들 어디에도 장성이 압록강까지 이어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의 장성을 하나로 연결하는 대대적인 토목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물이 흔히 말하는 만리장성이다. 진시황대의 만리장성은 기존 장성들을 토대로 한 것인지라 위치도 당연히 현재의 만리장성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동쪽 끝 역시 압록강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중국 국방사업의 중심은 동쪽에 있지 않았다
단명한 진나라를 대신하여 천하의 주인이 된 한나라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여전히 북방의 흉노였다. 흉노가 부단히 사단을 일으키자 한 고조(高祖)는 무력정벌을 꾀하였다. 강성한 흉노에 패하자 고조는 무력정벌을 포기하고 화친정책을 펼쳐 종실의 처녀를 흉노 우두머리에게 시집보내고 일정액의 재물도 바쳤다.
무제(武帝)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흉노를 제압한 한나라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북방과 서북방의 방어공사를 적극 추진하였다. 황허의 서쪽을 따라 장성을 쌓고 다수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기원 전후 무렵,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후한(後漢)은 건국 초기부터 흉노를 방어하기 위해 보루를 중축하고 견고한 방어공사를 진행하여 장성의 방어체계를 강화하였다. 진시황대에 하나로 연결되었던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지금의 장성은 명나라의 유물
현재 남아 있는 장성 유적은 대부분 명나라가 건국된 뒤인 14세기 말부터 건설되었다. 길이가 만리에 달한다 하여 만리장성이라 부르지만, 실제 길이는 이만리에 달한다.
명나라에 의해 멸망한 원나라의 후예들은 몽골(蒙古)로 퇴각한 뒤에도 북원(北元) 정권을 세우고 지속적으로 명나라의 북변을 위협했다. 명은 변경의 방어선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방어선 구축공사는 이백여 년 동안 계속됐다. 방위공사의 중심은 북부와 서북부에 두어졌다. 깐수성 자위관(嘉峪關)에서 시작된 명나라 장성은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시(秦皇島市) 동북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바다에 막혀 더 이상 동쪽으로 연장되지 못했다.
중국은 호산산성이 진시황대에 구축된 만리장성이 아닌, 명나라 때 새롭게 쌓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산해관 이동까지 장성을 확장했다는 기록도,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호산산성을 명나라 때 쌓은 것은 분명하지만, 산해관에서 압록강까지 장성이 한 줄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절해고도처럼 만리장성의 끝에서 수천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조그마한 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의 동쪽 끝일 수 있겠는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만리장성의 역사를 알고 있는 중국인들은 여전히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하이관이라고 말한다. 자국민까지 속여 가며 역사를 날조하고 있는 것은 극소수 연구자들이다.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상식을 벗어난 중국의 억지주장에 굳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무리 우겨도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