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2.08.19]대만에서의 충돌, 막을 방법 없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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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2-08-22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대만해협 위기의 과거와 현재김영신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대만해협 위기의 연원, 국공내전
미국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이 대만 동쪽 해역에서 전투태세 유지 훈련을 시작하자 인민해방군도 대만 주변에서 실전 연습을 진행하면서 대만해협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전에도 대만해협에는 몇 차례 위기가 있었다. 인민해방군의 일방적인 무력시위로 일단락되는 경우도 있었고, 양안(중국과 대만) 군대의 직접적인 충돌도 없지 않았다. 반복되는, 앞으로도 계속될 대만해협 위기의 근원은 양안의 분열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중국에게는 장기간에 걸친 대일항전의 승리를 의미했다. 대일전쟁의 승리에 환호할 틈도 없이 내전이 이어졌다. 정권을 지키려는 국민정부, 정권을 탈취하려는 공산당의 싸움은 공산당의 승리로 귀결됐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같은 해 12월 중화민국정부의 대만 파천으로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중국이 대립했다. 1950년 3-4월 서창(西昌)전투에서의 패배, 5월 해남도(海南島)와 주산군도(舟山群島)에서도 철군하면서 중화민국의 영토는 대만 본도와 팽호(澎湖), 금문(金門), 마조(馬祖), 대진도(大陳島)에 국한됐다.
군사적 실리(失利)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대만을 구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종식되자 인민해방군은 그 중심을 한반도에서 대만 방면으로 이동했다.
제1차 대만해협 위기
1953년말, 모택동(毛澤東)은 대만문제 해결을 위해 과감한 시도를 지시했다. 이에 인민해방군은 계획 중에 있던 금문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포기하고 대신 중화민국이 장악하고 있는 연해지역 도서에서 중소규모의 전투를 벌여 미국이 어디까지 개입하는지 시험해보고자 했다.
1955년 1월 인민해방군은 육해공 3군 협동작전을 펼쳐 대진도의 문호인 일강산도(一江山島)를 공격했다. 60시간의 공방전 끝에 1월 20일 인민해방군은 일강산도를 점령했다.
1955년 1월 29일, 미국국회는 대만결의안(Formosa Resolution of 1955)을 통과시켜 중화민국이 통치하고 있는 도서의 보호를 위해 파병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아이젠하워는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음을 시사했고, 주은래(周恩來)는 미국의 위협이 두렵지 않다고 맞받아쳤다.
일강산도가 함락된 뒤 장개석(蔣介石)은 대진도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1955년 2월 8-11일, 미국 해군 제7함대는 함정과 비행기를 동원해 민간인과 군인, 유격대원 2만 8500명을 대진도에서 철수시켰다. 대만해협의 첫 번째 위기는 이것으로 마무리되고 14일 인민해방군이 대진도를 점령했다.
제2차 대만해협 위기
1958년 8월 23일, 인민해방군이 금문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후 44일 동안 금문에 쏟아진 포탄은 50만 발에 가까웠다. 이 사건을 중국에서는 금문포격전, 대만에서는 8.23포격전이라 한다. 국제적으로는 제2차 대만해협 위기(Second Taiwan Strait Crisis)라 칭한다.
포격전 개시 초기 인민해방군은 군사목표에 대한 포격을 주로 하였으나 후기에는 해상운송을 봉쇄하여 금문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포격전 기간 쌍방의 해군과 공군 간에도 몇 차례 전투가 있었다. 10월 초 인민해방군은 봉쇄를 포기하고 홀수날은 포격, 짝수날은 휴식을 취하며 점차 공세를 완화했다.
인민해방군의 상징적인 포격은 미국과 중국이 건교(建交)를 선포한 1978년 12월 16일까지 이어졌다. 1979년 1월 1일 중국은 정식으로 금문에 대한 포격 중지를 선포했다. 금문포격전은 국공내전 종식 후 지금까지 쌍방 육해공군 간 최후의 대규모 군사충돌이었다.
제3차 대만해협 위기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뒤 미국은 중화민국과 체결한 「중미공동방어조약」을 폐기하고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으로 대체했다. 이 법안에 근거하여 대만과 상업, 문화 및 기타 방면의 관계는 계속 유지했다. 군사방면에서는 무기수출은 유지하였으나 공동방어체계에서 대만을 제외했다.
1995년 5월 22일, 클린턴 대통령은 중화민국총통 이등휘(李登輝)가 6월 초 미국을 비공식 방문하도록 허용했다. 근 17년간 중화민국 최고위층의 미국방문을 불허했던 관례가 깨지자 중국은 큰 불만을 표시했다. 1995년 7월부터 11월까지 인민해방군은 대만해협에서 미사일 발사와 군사훈련을 진행하여 이등휘의 미국 방문에 대한 항의를 표시했다.
7월 21일부터 28일까지 인민해방군이 발사한 동풍 15호(東風-15) 단거리 미사일 6발이 대만 기륭(基隆) 외해에 떨어졌다. 미국은 니미츠 함을 위시한 함대를 대만해역에 파견하여 견제에 나섰다. 8월 15일부터 11월 23일까지는 함정, 비행기, 보병, 해군 상륙부대가 동원된 인민해방군의 군사훈련이 대만의 건너편 복건성(福建省) 연해지역에서 전개됐다.
대만해협 제3차 위기는 1996년 3월 재발했다. 8일부터 25일까지 인민해방군은 대만해역을 목표로 제2차 미사일 발사 및 군사훈련을 진행했다. 이는 3월 23일 거행되는 대만 총통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대만 최북단 기륭과 서남단 고웅(高雄) 외해를 향해 미사일이 발사되고 인민해방군이 마조를 점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3월 8일 미국은 인디펜던트 함을 위시한 전투함대를 대만 동북해역에 파견 해공 연합훈련을 전개했다.
3월 11일, 페르시아만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니미츠호 함을 비롯한 선단이 대만 동부해역으로 이동했다. 베트남전이 종식된 뒤 미국이 아시아지역에서 최대규모의 군사훈련을 전개하면서 전쟁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인민해방군의 무력시위는 ‘양안 통일’을 지향하는 후보의 당선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열세인 것으로 여겨졌던 이등휘가 과반수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첫 번째 직선 총통에 당선되었다. 이등휘 당선 이후 대만해협의 위기는 점차 완화됐다.
대만해협 위기의 해소방안은
중국은 대만을 ‘미수복지’로 간주하고 무력을 써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는 어불성설이다. ‘수복’이란 과거 자신들이 장악하였으나 현재는 지배권이 미치지 않는 땅을 되찾는다는 의미이다. 중국은 단 한순간도 대만을 차지했던 적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중국공산당 창당 시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대만은 중화민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 대만에 대한 지배권은 여전히 중화민국정부에 있었다. 무력을 통한 대만 접수는 ‘수복’이 아니라 ‘침략’이다.
중국이 무력통일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대만해협의 위기는 계속될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대만해협의 위기를 해소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방안은 단순하다. 동독과 서독이 그랬듯이, 중국이 중화민국이라는 독립적 정치실체의 대만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뒤 과거와 같은 밀사(密使)를 통한 논의가 아니라,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대화의 장을 마련하여 통일과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