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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2.02.17] 거대한 자연재난, 그 뒤에 따라오는 혐오
[2022.02.17] 거대한 자연재난, 그 뒤에 따라오는 혐오
한중관계연구원2023-02-17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관동대지진과 제노사이드

재난을 대하는 인류의 자세

 

2020년 1월 창궐한 코로나 19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인류는 민족과 국가 간의 침략과 대결이라는 안보 구도에서 이제는 바이러스라는 오래된 존재와의 대결을 매일매일 이어나가고 있다. 얼마 전 영화 <아바타 2-물의 길>이 개봉됐다. 이야기 속에는 인류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보여줬다.

 

대학살, 난민 그리고 저항이 인류의 모습과 더불어 우리와 공존해야 하는 지구생명체들의 모습까지도 오늘날은 너무도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지구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던진 화두는 무엇일까. “인간, 착각하지마라, 지구가 너희 소유는 아니다”라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인간은 아직까지도 오만한 것 같다. 지구의 대지를 자신들의 ‘영토’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 방증하듯 지금까지 동북아에서도 이민족간의 침략과 저항은 수천 년간 이어져 왔다.

 

100년 전 일본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를 위시한 요코하마, 치바 등 일본 관동 지역에서 진도 7.9의 강진 이른바 즉 ‘관동대지진’은 제국주의 일본의 수도를 폐허로 만들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자본주의 체제를 ‘종교’처럼 받들어온 일본의 속도전이 무색할 만큼 1923년 도쿄에 대한 ‘자연공습’은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망자 9만여 명, 부상자 10만 여명, 행불자 4만여 명, 이재민 총수 340만여 명, 소실 가옥 44만 여 채 등 그 피해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다. 참혹함 그 자체였다.

 

▲ 요코아미쵸 공원 내 부흥기념관 안내 입간판 ⓒ김주용

 

▲ 부흥기념관 ⓒ김주용

 

일본은 이날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도쿄 요코아미쵸(橫網町) 공원 내 부흥기념관을 세웠다. 이 기념관은 1923년 관동대지진과 제2차세계대전기 미군의 도쿄 공습에 대한 역사를 기억, 전시하고 있다. 특히 관동대지진 전시관에는 ‘유언비어로 치안이 악화’되었다는 패널을 전시하고 있다.

 

내용은 “9월 1일 저녁부터 조선인들이 공격한다는 유언비어가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으며, 2일 밤 긴급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군대, 경찰 및 신문도 이를 믿고 행동하였기 때문에 민간인들 역시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 및 조선인으로 오인 받은 중국인 등이 살상 당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도 공식 기념관에 조선인 및 중국인에 대한 ‘살상’이라는 용어로 전시하였지만, 정작 학살(제노사이드)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 부흥기념관 내 관동대지진 전시관 설명문 ⓒ김주용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왜 학살이 아닌 살상으로 표현하는가’ 였다. 이는 단순한 용어 사용의 문제가 아니다. 살상은 단순한 유언비어의 오인으로 자연의 대재해 앞에서 사리판단을 잘 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용어이다.

 

하지만 학살, 제노사이드는 조직적으로 이민족을 절멸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런 점에서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에 대한 제국주의 일본(민간인 포함)의 행위는 제노사이드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9월 2일 도쿄 일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다음날 도쿄 전 지역으로 확대했다. 따라서 계엄령이 반포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본군들이 자행한 조선인 학살은 어찌 보면 일본 내에서 발생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발생한 민족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제국 일본이 일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으며, 한일 민족 간의 전쟁이 아닌 일본군에 의한 일방적인 조선인 학살의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 거주 조선인이라는 한계가 주는 압박감과 공포 속에서 재일 조선인은 단지 조선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유 없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그 숫자는 약 660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중한호조사의 대응과 중국 언론의 보도

 

일본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소식은 온 세계에 전해졌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신문을 통해 제국일본의 잔학상을 알렸다. 1923년 9월 3일 독립신문 호외를 통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참상을 첫 보도한 이후 여러 차례 자세한 상황을 게재했다.

 

당시 독립신문사 사장 김승학은 한광수를 파견하여 도쿄지역을 비롯한 일본 관동지역 조선인 학살 사건을 보고 받았다.

 

1923년 10월 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도로 상하이 거류 한인들은 학살사건을 조사하여 일본의 포악함을 비판, 성토하고 중국 등 세계 각지에 널리 알리기 위해 독립신문사 사장 김승학과 윤기섭, 여운형, 조덕진, 조완구, 이유필, 조상섭 등 7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물론 이들이 직접 조사한 것 보다는 현지 파견 특파원의 정보를 통해 전 세계 한인사회로 조선인 학살 기사가 전송됐다.

 

12월 5일 독립신문 기사에서는 희생된 조선인 숫자를 6661명으로 보도하였다. 이후 이 숫자는 오늘날까지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 숫자로 학계 등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1921년 조직된 중한호조사를 중심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인 학살에 맹렬한 비난과 대응을 촉구했다. 중한호조사의 활동은 중국의 대표적 신문인 신보(申報)를 통해 일반인에게 전달됐다.

 

1923년 10월 29일자 신보에는 중한호조사에서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정확한 경위를 밝히고 일본정부에서 사망자들을 위문하도록 교섭해야 할 것을 결의했다고 보도했다. 이 회의에는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 안정근이 참여했다. 그리고 다음날 일본 정부와 교섭하기로 작성한 선언문의 전문을 실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세계 인류가 일본이 지진 재해를 입은 것에 대하여 다 알고 있거니와 중한 국민은 역사적 원한을 가리지 않고 본인이 통합적으로 호소하여 모금을 진행하였고, 구제물품을 지원했으며 물심양면으로 원조했다. 우리가 인도적으로 일본의 지진피해를 지원한 이상 일본은 마땅히 인도적인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이와 반대로 중한 교포들을 무고하게 살해하였으니 일본 정부는 직접 살해하라는 지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폭도들이 중한 양국 교포들을 학살하라는 것을 묵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하략)”

 

선언문에는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와 학살관련자 처벌,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금 지불, 선언문을 일본인들에게 공포할 것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제국 일본은 중한호조사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한편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의열단에서는 제국 일본의 이러한 만행의 책임은 다이쇼라고 인식하였으며, 그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실행하였다. 단장 김원봉의 지시로 김지섭 의사가 직접 일본으로 가 일왕을 척살하기로 했던 의거였다.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의 영향을 아주 컸다. 일본 경찰 수뇌부가 경질되기도 했다.

 

역사의 치유는 가능할까?

 

가해자가 진정 사과하고 피해자가 온전히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회는 먼 미래의 이야기일까.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이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영화 <박열>을 보면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을 떠올렸을 것이다. 거기까지다.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비겁하게 숨기는 데 급급하다.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 및 중국인에 대한 역사 치유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2023년 2월 6일,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 북부에서 진도 7.8의 강진이 발생하였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의 사망자 수를 훨씬 넘는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안타까운 사연과 희생자 구조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해지고 있다.

 

자연 앞에 인류의 삶의 터전이 허망하게 무너진 튀르키예에 전 세계에서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당연히 한국에서도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는 튀르키예에 각 기관 및 개인들이 크고 작은 마음과 물품들을 보내고 있다. 자연 재해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태도이며, 지구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