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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3.04.28] 다시 고조되는 대만해협 위기, 대만문제 언급이 불장난인가
[2023.04.28] 다시 고조되는 대만해협 위기, 대만문제 언급이 불장난인가
한중관계연구원2023-05-01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대만해협 전쟁과 한국의 입장
김영신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대만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3월말 중남미 수교국을 방문했다. 귀국길에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거쳤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미국 연방하원의회 의장 매카시(Kevin McCarthy)와 회면했다. 미국과 중국이 수교한 1979년 이래 대만 영도자가 미국에서 만난 최고위층 인사이다.

 

관례대로 중국은 차이 총통을 환대한 매카시의 행동에 강렬한 항의를 제출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국의 독자 기술로 건조한 첫 번째 항공모함인 산둥함(山東艦)을 대만 최남단 인근 해역에 파견하여 대만해협의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대만해협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던지난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통신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 알려졌다.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대만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사회와 함께 힘에 의한 대만해협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이 발언에 중국이 발끈하여 “대만문제로 불장난하는 자는 반드시 불에 타 죽을 것” 등 격한 반응을 내놓았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문제가 핵심이익일 수 있겠지만, 힘에 의한 현상 변경 반대는 국제사회의 공론임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5일(현지 시각) 차이잉원(왼쪽) 대만 총통이 중미 수교국 방문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하며 케빈 매카시 미 하원의장을 만났다. ⓒAFP=연합뉴스

 

한국을 ‘혈맹’으로 여기던 대만, 대만에 무기지원을 요청한 이승만

 

1992년 한중수교 시 우리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여 대만과 단교하고 더 이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로 중국과 합의했다. 대만의 입장에서는 ‘혈맹’으로 여겼던 한국이 ‘배신’한 것으로 여겼지만, 냉혹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단교 이전까지 한국과 대만은 ‘동맹’ 수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군사적인 면에서의 협력관계도 밀접했다. 한국이 대만에 무기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고, 한국전쟁 시 대만은 전투부대를 파견하여 한국을 돕고자 했다.

 

1949년 8월, 이승만과 회동차 장제스(蔣介石)가 한국 진해를 방문했다. 진해회담 열흘 뒤 이승만의 밀령을 받은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차관 최용덕이 주한대사 사오위린(邵毓麟)을 찾았다. 이들은 군사원조를 거론하며 장제스에게 보고하여 주기를 청했다.

 

사오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이승만은 급히 원조를 필요로 하는 무기와 탄약의 목록은 국방부장관이 따로 제출할 것이니 필히 장제스에게 전해줄 것을 당부했다. 신성모가 제출한 목록상의 필요 무기는 전투기와 정찰기 및 수송기 등 각종 비행기 65대, 소총 5만 자루와 탄약 1억 발, 구축함과 호위함 등 함선 7척 등이었다.

 

국공내전에서의 형세가 매우 불리한 내부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장제스는 이승만의 무기원조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무기원조 외에도 합동군사훈련, 중공에 대한 해상 봉쇄, 적후공작 등 군사호조는 이후로도 한국과 대만 간에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다.

 

한국전쟁 참전을 희망한 장제스

 

대만에 대한 무력침공은 건국하기 전부터 중공이 정한 기본방침이었다. 1949년의 마지막 날 중공은 “다가오는 1950년의 가장 중요한 전투임무는 대만, 해남도와 서장(티벳)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공언했다.

 

중공이 체제를 갖춘 후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대만은 기껏해야 3년을 연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1950년 2월과 4월 중앙정보국은 대만은 중공의 공격을 막아낼 능력이 없어 1950년 말 이전에 함락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분석했다.

 

1950년 여름 국제공산집단은 두 가지 대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는 7월 중공군의 대만 침공이고, 다른 하나는 8월경 북한이 남한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대만과 남한은 모두 미국의 국방경계선 밖에 있어 공산집단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먼저 발생하면서 대만과 한국은 다른 운명을 맞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해군 제7함대에 대만해협 순항을 지시했다. 한국전쟁을 틈탄 중공군의 대만침공을 방지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미군의 개입은 대만의 군대가 대만해협을 건너 중국본토를 공격하는 것도 막아 장제스가 원하던 ‘반공대륙’이 무망하게 했다.

 

6월 27일 유엔 안보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회원국들이 한국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유엔의 결의사항을 보고받은 장제스는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육군 3개 사단과 전투기 20대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는 대만의 내부적 결정이었을 뿐, 실제 파병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미국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이었다.

 

7월 1일 미국은 “파병은 대만의 방위 역량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내용의 비망록을 제출하여 파병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장제스는 1950년 11월 초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참전 이후, 1952년 10월 태평양함대사령관의 요청이 있은 때 등 이후로도 몇 차례 파병을 깊이 고려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대만전쟁과 미국, 한국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 대만군의 참전을 불허하였고, 중공을 압박하기 위해 역으로 대만군이 군사활동에 나서주기를 희망했다. 미국은 항상 국제 정치환경을 고려하고, 자국의 이익에 가장 적합한 결정을 내려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어느덧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대만해협의 긴장상태도 덩달아 증폭되어 대만해협을 무대로 한 전쟁이 조만간 현실화될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의 형세발전으로 보아 전쟁이 발생하면 미국은 당연히 개입할 것이고, 미국이 개입하면 한국은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인지 궁금함과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대만전쟁에 미국과 한국이 개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전제는 중국이 과연 대만전쟁을 일으킬 것인가이다. 중국은 대만문제를 핵심이익으로 여기고 있고, 핵심의 핵심은 대만의 ‘독립’ 여부이다. 대만이 독립하는 정치상황의 극단적인 변화는 중국이 전쟁을 일으킬 확실한 명분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 중국이 대만을 향해 물리력을 행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켰으나 대만을 ‘수복’하여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오히려 대만이 독립을 추구할 빌미를 제공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대만문제를 거론하는 국제사회에 대해 불장난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는 중국에도 섣부른 물리력 동원은 자신들을 불태우는 불장난이 될 것이다.

 

시진핑(習近平)의 말대로 중국과 대만은 동문동종의 한 민족이다. ‘대만수복’이라는 명분만으로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중국의 입장에서도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지 않는 한 대만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대만전쟁에 어떤 입장과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현재로서는 심각하게 고려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