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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3.10.20] 2023년 가을, 안중근 의사를 소환하는 이유
[2023.10.20] 2023년 가을, 안중근 의사를 소환하는 이유
한중관계연구원2023-10-20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동북아의 평화는 요원한 것인가

 

지난해부터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은 지금도 당사국 국민들은 물론이요, 주변국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결코 먼 나라 일이 아니다.

 

북한은 그들의 자구책으로 벼랑끝 전술이라고 할 수 있는 ‘핵무장’을 선언했으며,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는 뉴스가 등장하고 있다. 한중일과 북중러의 신냉전 대결이 고착화될 것이라는 정치학자들의 견해가 언론을 통해서 연일 흘러나오고 있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경제성장과 민주정치의 모범을 발현시키고자 했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진정 시민과 국민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이 구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23년 10월의 한반도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주창했던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뤼순 공판 투쟁의 시말을 그의 의거 기념식 때 잠시 소환하는 데 그칠 것이며 여전히 남과 북은 대결의 장에서 쉽게 나오려고 하지 않을 것 같다.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현실이다.

 

▲ 안중근 의사. ⓒ독립기념관

 

이토의 ‘죄’

 

1909년 7월 6일 일본 각의(閣議)에서는 ‘한국 병합에 관한 안건’이 결정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대한시설대강(對韓施設大綱)이 확정되어 구체적 작업에 들어갔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관된 정책을 견지하였으며, 그 해 11월 17일 고종을 협박하여 을늑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당시 일본 국내의 독점자본 형성의 촉진과 일반 민중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방어능력을 상실한 대한제국을 완전 병합하기 위한 전초 단계였다.

 

일제는 이른바 아시아 연대주의론을 내세워 서구열강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대한제국이 대등한 형태로 ‘합방’하여 대동국을 건립하고 청국과 연계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한국병합과정에서 대아시아주의자들이 침략성을 은폐하는 관념적 무기로써 그리고 친일 분자들이 자신들의 매국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일제의 대한제국 식민지화 정책의 실질적 정책 실행자, 특히 회유파의 거두인 이토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대한(對韓) 정책의 실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당시 초대 통감의 자격을 둘러싼 일본 내부의 쟁점 속에서 카스라 타로(桂太郞)는 대구미(對歐美)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구미열강에게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외교경험이 풍부하고 천황의 신임이 두터운 문관을 초대 통감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다년간 외교경험이 풍부한 이토가 한국 통감으로 결정되고 그는 바로 군대통수권을 확보하였다. 결국 1905년 12월 21일 이토가 천황의 특지를 얻어 초대 통감에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이토는 통감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사회를 일본 자본주의체제의 이식에 적합한 구조로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은 극도로 피폐하였기 때문에 이를 개조하지 않고는 도저히 한국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이토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의 대한 정책이 선정(善政)이라는 것을 홍보하기 위함이며 이에 반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토는 1907년 6월 4일에 “한국을 멸망시키는 자는 일본인이 아니라 내외 사정을 모르면서 경거망동을 하는 한국인이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된다면 한국은 자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국의 보존에 가장 적절하고 긴요한 방침은 한국이 일본과 성실하게 친목을 도모하고 존망을 같이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토의 한국에 대한 구제론은 한국보호국화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무기였다. 그는 시혜적인 보호론을 주장했다.

 

“한국인은 외교권을 운운하지만 일본의 보호를 벗어나서 자립할 의지가 없고 오히려 다른 나라에 의지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 당시(을사늑약) 만약 일본이 외교권을 획득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다시 곧 각국의 각축장이 되어 한국 때문에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였을 것이며, 그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한국을 병합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을 그와 같은 상황으로부터 구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토의 이러한 대한 정책은 안중근이 제시한 이토의 죄목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토는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한 제반 여건 즉 헌병경찰제도의 확립, 재정․화폐제도의 확립, 토지수탈과 식민지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다.

 

이는 이토가 동양평화의 유지를 주장한 일한제휴론(日韓提携論)이 고도의 기만적인 술책에 지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특히 일진회와 연계하여 한일합병을 추진하였던 것은 일반 민중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얼빈안중근의사기념관 : 기억과 기념의 한중 공동공간

 

중국인들 가운데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인물로는 대표적으로 주은래 전 총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1962년 담화에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총성이 한중양국 공동항일 투쟁의 첫발이었다”라고 한 것은 그가 외국인이었던 안중근 의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사실 주은래는 일본 유학시절이었던 1919년 7월 29일 중국의 5.4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갈 때 3·1운동의 열기를 체험하기 위해 한국을 들렸다. 이후 주은래는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24년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그가 황포군관하교 정치주임으로 재직할 때 한국인 교관 양림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45년 9월 주은래의 요청으로 모택동이 장치중의 가옥 계원(桂園)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을 비롯한 한국대표단을 초청한 것은 한국과 중국이 공동 항일투쟁의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중국인의 존경을 받았던 안중근 관련 유적지는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물론이며, 그가 태어났던 북한 땅에도, 러시아 연해주에도, 심지어 일본에도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장소가 있다. 하지만 그의 유해발굴은 순국한 지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안중근 유해발굴은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북이 공동으로 조사하고 중국이 협조하는 선에 합의를 보았다. 남과 북의 실무단이 개성에서 회담을 열고 어떤 방식으로 안중근 유해발굴을 할 것인지 세부사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때 유해발굴의 중요자료가 바로 최서면이 제시했던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당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을 때 형무소장의 딸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은 그 사진에 바로 안중근 의사의 매장 현장이 나와 있다는 논리에서 출발했다.

 

최신 기법을 동원하여 사진을 분석해서, 현재 아파트가 들어선 곳을 2008년 초에 발굴했는데 각종 쓰레기만 나와서 발굴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가운데 2014년 1월 하얼빈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그동안 한중 양국이 노력한 결과물이다. 또한 현지 하얼빈 조선족들의 헌신적인 노력도 한몫했다. 중국 신문에 난 중국 지도자들의 기사를 모아서 자료집으로 내기도 했으며, 2005년 하얼빈역에 조그만 표식과 하얼빈 공원에 작은 기념비를 설치하면서 공간의 역사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한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서 하얼빈역에 안중근의사기념비 건립을 요청하였고, 중국은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으로 화답하였다. 이렇게 안중근 의사의 행적은 한중공동이 기념하는 공간 마련으로 후대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 안중근 의사가 꿈꾼 조국은 어떠한가.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 면회를 온 두 동생 정근, 공근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나를 하얼빈공원에 묻어다오, 그리고 해방 후 조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그러면 하늘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다.”

 

그가 순국한지 꼭 35년 만에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그리고 또 70여 년이 지났다. 나라는 두 동강이 났다. 전쟁이 일어났고, 다시 분단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안 의사가 꿈꾸었던 독립이 되었지만, 과연 그가 추구했던 동양평화의 주역이 되었는가. 아니면 오히려 남과 북은 갈등과 분열, 오만과 독선이 춤추는 그런 사회가 되었는가.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우리시대의 자화상인가.

 

“과거를 잊지 않고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작은 진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공익은 없고 나만의 것만 추구하는 사회, 눈과 입과 귀에만 복음을 주는 사회, 정신에는 복음을 주지 않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 광복 78년에 가슴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주 목요일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3주년이다. 그의 ‘동양평화’를 위한 자기희생의 정신을 이 가을에 소환하는 것은 그에 대한 우리들의 작은 예의이며, 이러한 기억을 후대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책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