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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4.03.23] 김구는 폭력적? ‘치하포 사건의 불편한 진실’이 불편한 이유
[2024.03.23] 김구는 폭력적? ‘치하포 사건의 불편한 진실’이 불편한 이유
한중관계연구원2024-03-25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동북아 공생과 평화를 꿈꾼 백범 김구 이야기
김주용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제국주의 시대를 겪다

올해는 대한민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해이다. 러시아는 이미 대선을 치뤘으며, 미국의 대선은 11월에 진행될 예정이다. 지도자의 위상과 역할이 아주 중요시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도자들의 편협한 자국사 중심의 역사관 등이 작동되어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날 백범 김구의 헌신적인 독립운동은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국 포털사이트 가운데 하나인 바이두(baidu)에는 백범 김구가 남긴 [백범일지]가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한국인들에게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백범의 인생이 담겨있는데, 그가 리더로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추진했던 것은 임시정부의 정상화였다. 그 작업 가운데 하나가 한인애국단의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의 새롭고 강력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의열투쟁은 김구의 손에서 탄생됐다.

 

백범 김구는 1876년에 태어났다. 이 시기 전 세계는 서구자본주의가 제국주의 기치 하에 식민지 확장에 탐욕을 보였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일본 역시 류큐(琉球)를 복속하고 조선을 개항시켰으며, 1894년 청일전쟁의 승전물로 타이완을 차지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국주의 일본이 벌인 제노사이드의 실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 공동체의 문제였다. 동학농민혁명, 의병, 3.1운동, 경신제노사이드, 관동대학살 등 그 규모와 살육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제노사이드 범주에 속한다.

 

동북아시아 대부분 국가의 구성원들은 제국주의에 침략을 받았으며, 대한제국 역시 1910년 제국주의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김구의 나이 34살 때의 일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후대, 특히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백범일지]를 남겼다.

 

필자는 2004년 12월 타이페이 한 호텔에서 학술회의를 마치고 주최 측의 만찬에 참가했다. 같은 테이블에 있던 노년의 신사는 필자에게 혹시 김신을 아냐고 물었다. 안다고 이야기 하자, 그 노신사는 김신이 내 친구라고 하면서 한참 동안 김신에 대해 이야기 했다. 김신, 바로 백범 김구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1962년 9월에 대만대사로 부임하면서 아버지가 강조한 아름다운 문화의 나라 대한민국을 알리고자 했던 것 같다. 당시 신해혁명의 주역이자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중국인들의 후예들을 주 대만 한국대사관에 초청하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기념사진까지 남겼다.

 

▲임시정부 시절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이 속했던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김구 기념관 전시 사진) ⓒ손호철

 

치하포 사건의 진실

최근 인터넷상에서 백범 김구의 치하포 사건에 불편한 진실이 있다며 공개적인 문제를 제기한 예들이 제법 있다. 몇 해 전 영화계에서는 치하포 사건 이후 김구의 감옥생활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 대장 김창수가 개봉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치하포 사건이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까.

 

먼저 백범에 대해 살인자라는 인상을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어 보인다. 김구는 1896년 3월에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팩트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 사건에 대해 백범일지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던 김구는 자신의 청춘시절이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함께 지나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접주였으며,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을 당대에 직접 겪었다. 그의 20대 당시 조선은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칭하였고 다시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허물어졌다. 치하포 사건은 그의 나이 만 20세 때 일어났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특히 김구를, 폭력을 좋아하는 이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피압박 민족들의 저항이 왜 필요한지를 알 수 있는데, 이를 간과한 인식으로 보여진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줄곧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적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그 영향은 고스란히 ‘민(民’)이 받아 내었다. 따라서 한반도 곳곳에서 반외세 저항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 적용해도 무방하다.

 

지난 2002년 돌베개에서 출간한 [백범일지]의 91~100쪽에 치하포 사건의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서술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 김구가 죽인 일본인이 과연 일본 군인이 아니라 상인이었을까의 문제가 있다.

 

[백범일지]에 쓰치다(土田讓亮)를 육군 중위로 묘사했지만 일본 외무성 문서에는 나가사키현 쓰시마섬 이즈하라 항 상인으로 1895년부터 조선에서 활동한 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백범이 일본육군 중위가 아닌 상인을 살해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조선에서 활동했던 상인들의 상당수는 일본의 정보원들이었다.

 

사실 인천 재판소의 심리 진행과 판결은 일본 측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백범일지]의 상세한 서술 이외에도 당시 기록물인 공초에 김구의 행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백범일지]는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귀한 사료이다. 다만 모든 사료가 그러하듯 그 사료에 대한 면밀하고 정치한 검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백범일지를 직, 간접적으로 다룬 연구성과도 수십편이다. [백범일지]에도 기억의 오류는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 사료의 기록성과 역사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치하포 사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인가 아니면 단순한 살인 강도였을까. 인천감리서에 이송된 후 김구의 신문 기록 가운데 1차 신문 기록에 살해동기를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라고 했다. 3차 신문에서도 김구는 “나는 나라 백성이 되어 원통함을 품고,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이 의거를 일으켰다”라고 단호하게 진술했다.

 

[백범일지]에서도 국모에 대한 복수를 누차 강조하였다. 그런데 당시 [독립신문] 1896년 9월 22일자에는 치하포 사건을 단순강도 사건으로 보도하였다. 해주부에서 일본영사관의 입김이 강조된 공초는 치하포 사건의 본질을 일본인 상인의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계획적인 강도, 살인 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인식이 현재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구의 행위는 한 개인의 일탈행위가 아니라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이자 국권회복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다. 역사의 실체를 망각한 인식의 표출은 이래서 위험하다.

 

힘없는 민(民)의 저항과 그가 남긴 평화의 실체

왜 백범은 인천 감옥에서 새로운 세상을 그렸을까. 그것이 치하포 사건을 둘러싼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아니겠는가.

 

백범은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초연하지 못하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는 죽음 앞에 초연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는 많다. 안중근 의사가 그랬으며, 윤봉길 의사도 그랬다.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이었던 인도의 간디는 어떠한가. 그는 3.1운동의 열기에 감동을 받았으며, 이를 인도 독립운동에 접목시키고자 했다. 간디는 1869년 생으로 김구보다 7살 위다. 그의 어린 시절 역시 제국주의 영국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독립운동 방식을 굳이 백범 김구와 비교하려 함이 아니다. 젊은 시절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혁명가들을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하는 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범은 신민회 사건으로 고통스러운 감옥생활 역시 감내해야 했다. 이 사건의 가장 어린 조사 대상자였던 독립운동가 선우훈이 쓴 [민족의 수난-105인 사건 진상]에 나오는 경험담은 평화로운 일상사를 영위하는 시대에는 결코 이해하기 어렵다.

 

지옥같은 잔인, 모멸, 극악을 다하는 악형을 수십일 견디었던 선우훈의 감옥생활은 일상사였다. 백범도 그러했으리라. 백범은 이렇게 참혹하기 그지없는 고초를 극복하고 조국을 찾는 길에 자신의 여생을 바쳤다. 그가 3.1운동의 적장자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처하고, 경무국장과 국무위원을 지낼 때에도 제국주의 일본의 그에 대한 암살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김구의 생이 압축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백범일지]는 1994년 중국 북경대 쉬엔더우(宣德五) 교수의 주관으로 중국어본이 출판됐다. 그해 7월에 중국 정부는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정식으로 [백범일지] 기념식을 거행했고, 10여 년 뒤인 2006년에는 재판을 찍을 정도였다. 그만큼 중국인들에게도 백범 김구의 생애사가 조국독립, 민족통일, 동북아 평화에 헌신한 인물로 기억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