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아시아 (원대신문)
| [2026.03.08] 중국 최초의 여성 법학박사 정육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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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관계연구원2026-04-03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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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3월 20일, 정육수(鄭毓秀, 1891-1959)는 광동성 광주 신안현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광서제가 즉위한 지 17년 정도 되는 해였다. 청나라가 양무운동에 실패하고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던 시기였다. 나라는 혼란했지만, 그녀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홍콩에서 잘나가는 부동산 상인이었고, 아버지는 청나라 정부의 호부 관리였기 때문이다. 똑똑한 딸을 좋아했던 부모님 탓이었을까, 그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반항기가 많았다. 당시 여자들은 발이 크지 못하도록 천으로 감싸는 전족을 했었는데, 어릴 적부터 주관이 뚜렷했던 정육수는 그에 반대하여 전족을 하지 않았다. 열두 살이던 1903년, 딸이라도 재능을 갖기를 원했던 어머니를 따라 북경에 가서 신식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열세 살이 되던 해, 그녀의 할머니는 아직도 어리기만 한 그녀를 양광총독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양광총독은 광동과 광서 두 성을 모두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당시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혼사였다. 그러나 그녀는 혼인할 상대방에게 편지를 보내 혼약을 파기했다. 이 일로 집안에 큰 난리가 났다. 결국 그녀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언니와 함께 천진으로 이사하여 미국 선교회가 세운 중서여학교에 들어갔다. 혁명운동가가 되다 청나라 말기 중국에서는 일본 유학이 크게 늘고 있었다. 그녀도 근대학문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정치에 관심이 있던 그녀는 혁명지도자 손문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그렇게 그녀는 혁명당원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단순한 가담자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혁명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혁명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암살이었다. 그녀 또한 1907년 청나라 고위 관리를 암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암살대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유일한 여성 대원이었다. 치안당국의 의심을 피하고자 왕정위(汪精衛)는 여성 대원이었던 그녀에게 폭탄을 운반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수락했다. 이후 두 차례 더 청나라 정부 요인 암살에 참여했다. 그녀는 혁명의 걸림돌이었던 원세개를 암살하기 위한 조직의 책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실패했고, 관련되었던 10여 명이 잡혀갔다. 몇 명은 석방되었지만, 몇 명은 총살되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암살에 참여했다. 군주 입헌을 주장하던 종사당(宗社黨)의 핵심 인물이었던 양비(良弼)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양비는 만주족 출신으로 청나라 황제의 퇴위에 반대하고 있었다. 암살은 성공했다. 결국 혁명파가 원했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졌다.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지만, 중국 여성들에게 곧바로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에 정육수는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1912년 제정된 <임시약법>에는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고 되어 있었지만, 여성의 참정권은 제외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치는 오직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다. 1912년 2월 20일, 정육수는 여러 여성 단체와 함께 여성참정동맹회를 결성하고, 여성의 참정권을 얻기 위해 싸웠다. 중화민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은 1947년에나 인정되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정육수가 법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여성 법학자가 되다 1912년 3월 정육수는 프랑스 유학을 위한 예비학교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배웠다.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4월 1일에는 천진에서 『여자국학보』라는 신문을 창설하여 여성에게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여성과 국가의 관계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8월에는 『애국일보』를 창간하여 논설 활동도 했다. 1913년 그녀는 훗날 유명한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오치휘 등과 함께 드디어 프랑스로 떠났고, 이후 13년 동안 유럽에서 유학했다. 그녀는 파리대학의 전신인 소르본대학에서 법학을 배웠다. 1917년 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곧이어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녀는 재학 중에 프랑스 법률학회에 가입했는데, 중국인 최초였다. 1919년 1차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중국에게 결정권은 없었지만, 전승국의 일원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한 정육수는 중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연락 및 통역을 맡았다. 중국은 독일이 점령했던 산동반도를 돌려받고 싶었으나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일본에게 산동반도를 이양하고자 했다. 이 소식이 중국 본토에 알려지자, 오사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중국 측 대표단장은 외교 총장 육징상이었다. 정육수는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던 중국 유학생들을 모아 대표단 숙소로 가서 조약에 서명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육징상은 정부로부터 서명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정육수는 정원에서 꺾은 장미를 소매에 숨겨 권총을 가진 것처럼 위장하고 육징상을 찾아가 서명하지 말라고 위협했다. 결국 육징상은 서명하지 않았다. 1920년 정육수는 사천 성장의 초청을 받아 사천에 가서 남녀평등을 선전하고 여학생들의 해외 유학을 장려했다. 11월 20여 명의 여학생을 데리고 프랑스에 가서 그들의 유학 생활을 도와주었다. 그때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장진화는 1930년에 이학박사가 되었다. 12월 정육수는 프랑스어로 자신의 자서전을 출판했다. 1923년 5월, 정육수는 로마에서 열린 국제여성참정회 제9차 대회에 여성참정동맹회 대표로 참석하여 중국 여성의 참정권 실태를 보고했고, 각국의 대표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1924년 그녀는 드디어 『중국 비교헌법』이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하여 유럽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중국 여성이 되었다. 1926년 귀국한 그녀는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위도명(魏道明)과 함께 위정연합법률사무소를 설립하여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렇게 중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중화민국 민법을 기초하다 1927년 4월, 정육수는 강소성 정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 조계지 제2특별법원 원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위도명이 사법부 비서장이 되면서 위정연합법률사무소는 해산되었지만, 두 사람이 결혼함으로써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정육수는 상해법정대학 총장이 되었다. 1928년 12월, 남경 국민정부에 입법원이 설립되었는데, 정육수는 제1기 입법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여성 입법위원은 정육수를 포함해 단 두 사람뿐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장개석의 아내 송미령이었다. 1929년 민법 기초위원회 위원 다섯 명 중 한 사람이 되어 중화민국 민법을 공동 기초하였다. 그녀는 민법에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조항을 포함시키고자 노력했다.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상속권을 인정하고, 부부간에 상속권을 명문화하며, 미혼 여성 본인에게 혼인계약을 맺고 해지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기혼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는 것 등이었다. 항일전쟁 시기에 정육수는 입법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교육부 차장을 역임했다. 그녀는 책상에만 앉아있지 않았다. 직접 부녀자들을 조직해 군인들을 위로하고 부상자를 돌보았다. 1942년 위도명이 주미공사로 부임하게 되어 정육수도 함께 미국으로 갔다. 이후 위도명은 주미대사가 되었다. 위도명이 대만성 주석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정육수도 잠시 대만에서 살았지만, 1948년 두 사람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중국 최초의 여성 법학자이며 변호사로서 평생을 혁명과 여성을 위해 싸웠던 그녀는 1959년 12월 16일 로스엔젤레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나이 68세였다. 김현주 교수(철학과) 출처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http://www.wknews.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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