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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아시아 (원대신문)

[2026.04.20] 항저우의 마천루 사이에서 만난 백 년 전의 봄
[2026.04.20] 항저우의 마천루 사이에서 만난 백 년 전의 봄
한중관계연구원2026-04-21

항저우의 마천루 사이에서 만난 백 년 전의 봄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조대호

  얼마 전 4월 11일 오전 11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7주년이 되는 뜻깊은 시각에 맞춰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상해를 떠나 일제의 추격을 피해 다시 뿌리를 내려야 했던 그곳. 선열들이 독립운동을 이어갔던 현장을 마주하자, 가슴 한 켠이 조용히 울렸다.

  오늘날의 항저우는 수많은 혁신 기업이 모여든 거대한 미래 도시다. 서호(西湖) 주변을 걷는 청년들의 활기와 초고층 빌딩이 어우러져 눈부시게 빛난다. 1932년 상해를 떠나 쫓기듯 거처를 옮겨야 했던 척박한 길 위에서 선열들은 이토록 찬란한 미래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화려함의 한복판에는 작고 낡은 임정 청사가 고요히 남아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땅 위에, 한 민족의 아픈 역사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발걸음을 오래도록 붙잡았다.

  이 작은 공간이 오늘까지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존중하고 보존하려는 중국 정부의 배려, 그리고 천안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국내 유관 단체들의 꾸준한 관심과 지원이 이어져 왔다. 여기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뒷받침까지 더해지며, 이곳은 단순한 유적을 넘어 한중 간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낯선 타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고 지켜주었던 과거의 연대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아시아에 몰아쳤던 제국주의의 광풍 속에서 국경을 넘어 피어났던 저항과 연대의 기억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여러 갈등을 풀어갈 소중한 자산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 여정은 은사인 한중관계연구원 유지원 원장님, 그리고 역사문화학과 김주용 교수님과 함께여서 더욱 뜻깊었다. 두 분과 나란히 낡은 계단을 오르고 좁은 청사의 집무실을 찬찬히 둘러보는 동안, 팍팍하고 열악한 현실 속에서도 조국 광복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을 끈질기게 부여잡았던 선열들의 숭고한 숨결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빛바랜 사진과 유물들 앞을 거닐며 나누었던 짧은 대화 속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숙연함이 묻어났다. 이어 청사 안쪽에 모셔진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 앞에 다 같이 고개 숙여 헌화하던 순간, 바깥의 번잡한 소음은 일순간 잦아들고 벅찬 정적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타국 땅에서 스러져간 이름 모를 수많은 청춘과 조국을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분들에게, 우리가 정성껏 올린 국화 한 송이가 시간을 뛰어넘어 작고 따스한 위로로 닿기를 마음 깊이 기원해 보았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아시아라는 무대는 이처럼 눈부신 번영의 현재와 가슴 아픈 근대사의 상흔이 켜켜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공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수놓은 항저우의 야경을 바라보면서도, 차가운 빌딩 숲 사이를 도도하게 흐르는 양국의 오랜 연대와 아프지만 찬란했던 우리의 역사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우리 원광대 후배 학생들도 이 장면을 한 번쯤 가슴 깊이 상상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발전의 이면에는 수많은 이들의 피땀 어린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기억을 온전히 마주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이해가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한 성찰과 공감이 쌓여, 훗날 후속 세대가 단편적인 갈등을 넘어 더 넓고 포용적인 시선으로 한중관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단단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