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15.02.26] “뇌물 16조 원, 대륙서 탐관오리 사라질 날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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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연구원2021-01-21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시진핑의 부정부패 척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관료층의 부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현상이다. 특히 중국과 같이 거대한 나라는 더욱 심각할 것이다. 작게는 현(縣)정부의 하위 공무원부터 크게는 중앙정치국(中央政治局)의 상무위원(常務委員)까지, 그동안 중국의 부정부패는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나마 시진핑(習近平)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개혁개방 이후 수십 년간 쌓여온 부패 문제에 서슬 퍼런 칼을 들이대면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뿌리 깊게 박혀있는 중국의 부정부패 문제는 아직도 더 강력하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할 듯하다. 사실 중국에서 부정부패가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황제’라는 권력의 최정점을 등에 업고 더 심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중국 역사 속의 탐관오리들은 과연 어땠을까?
중국의 최초의 탐관오리들
중국의 문헌 기록에 나오는 최초의 부정부패 관료는 양설부(羊舌鮒)라 한다. 양설부는 춘추시대 진(晉) 나라의 귀족으로 대부(大夫)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군권을 장악한 그는 주자(邾子), 위(衛), 정(鄭), 제(齊), 노(魯) 나라 등 수십 개국을 침략, 약탈하여 재물이 남아나질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한 없이 재물을 쌓아가던 그는 결국 뇌물 때문에 살해당하게 되었다. 땅의 경계 문제로 다투던 안건의 처리 과정에서, 자신의 딸을 뇌물로 바친 이를 맹목적으로 돕다가 다른 편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가 죽자 그동안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묵형(墨刑, 얼굴에 범인의 표식인 문신을 새기는 형)에 처해지고, 시신은 저잣거리에 걸렸다. 탐오(貪汚)와 같은 말로, ‘욕심이 많고 악렬하다’는 의미의 ‘탐묵'(貪墨)이라는 말은 바로 양설부에 의해 탄생하였다.
부패로 처형당한 중국 최초의 승상은 한(漢) 나라 때의 이채(李蔡)이다. 한 무제(武帝) 시기, 흉노(匈奴)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승상의 자리에 오른 이이다. 한 무제의 총애로 황제 다음가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인간의 욕심은 과연 끝이 없는 건가? 이채는 돈에 눈이 멀어 한 경제(景帝, 한 무제의 아버지) 능묘 앞의 땅을 몰래 점하여 팔았다가 발각되어 옥중에서 자살하였다.
백성들의 혈세로 먹고 마셨던 당(唐)
중국에서 최근에도 자주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로 국민의 혈세로 과도하게 식사를 하는 ‘공금으로 먹고 마시기'(公款吃喝)가 있다. 당 태종이 천하를 통일한 후 사후처리를 위해 신하들과 회의를 하는데, 시간이 너무 길어지자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조정에서 같이 밥을 먹게 했다고 한다. 이것을 최초의 ‘공금으로 먹고 마시기’라고 여기고 있다.
그럼 이들이 먹는 음식들은 간단한 ‘도시락’ 정도였을까? 당대 제도에 관한 기록인 <당육전>(唐六典)을 보면, 관직에 따라 규격이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현재 ‘5성급’ 호텔에서 먹는 수준이었다고 상상하면 된다. 게다가 음식이 하도 많아서 먹고 남은 음식은 싸갈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한 예로 당 정원(貞元, 785~805년) 때 낙양(洛陽)의 물가가 치솟아 비싼 음식들을 먹을 수가 없자, 조경탁(曺庚倬)이라는 사람은 항상 과부인 누나를 위해 먹고 남은 음식들을 싸갔다고 한다.
‘고신불양렴(高薪不養廉, 높은 봉급에도 청렴함을 키울 수 없다)’의 송(宋)
송대 재상급의 연봉은 어마어마했다. 3600관전(貫錢), 속미(粟米)1200석, 하인 70명분의 옷과 양식이었는데, 예를 들자면 송대 여진족(女眞族)과 맞서 싸운 것으로 유명한 영웅 악비(岳飛) 장군의 한 달 월급이 우리 돈 8000만 원이었다고 하면 쉽게 감이 올 것이다.
하지만 이런 높은 월급에도 만족하지 못 하고 부패를 저지른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북송 말기의 재상이었던 채경(蔡京)이다. 그동안 부정으로 축재해온 50만 무(畝, 약 333만 ㎢, 축구장 47만 개)에 달하는 광대한 땅을 가졌으면서도 이에 멈추지 않고 가짜 장부를 만들어 월급을 두 배로 받기도 하였다. 그는 결국 여진족의 금(金)이 침략한 ‘정강의 변'(靖康之變)을 초래한 주역으로 여겨져 유배당해 죽었다.
역대 최강의 탐관, 청(淸)의 화신(和珅)
시간이 흘러 인류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욕심도 커지는 것일까? 청대의 화신은 건륭제(乾隆帝)의 총애를 배경으로 각종 부정부패를 저질러, 중국 ‘최대최고의 탐관’이라는 악평을 듣고 있다. 심지어는 황제에게 진상하는 물품들도 그의 손을 거쳐 황제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물건을 먼저 빼돌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든든한 배경이었던 건륭제가 죽은 후 악행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20개 대죄’라는 죄명으로 처형당했고, 가산도 전부 몰수당했다. 청대 어느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화신은 20년간 관직에 있었지만, 그가 모은 재산은 한 나라의 20년 세입(歲入)보다도 많다”라고 할 정도로 화신이 모은 금은보화, 부동산 등 재산의 규모는 상당했다. 그는 2001년 <월스트리트 저널 아시아>가 선정한 ‘과거 1000년간 전 세계 가장 부유한 50인’에 뽑혔다고도 한다.
부정부패의 끝
북송(北宋) 진종(眞宗) 시기에 편찬된 <책부원구>(冊府元龜)라는 책을 보면 중국을 통일한 진(秦, BC 221~BC 207) 나라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60)까지 처벌을 받은 탐관오리는 460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고관으로 승상(丞相, 현재의 국무총리 정도)만도 29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이 쫓겨날 정도면 대체 얼마나 심하게 ‘탐묵’한 것인가 쉽게 알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과거 중국의 재상급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하나였던 저우융캉(周永康)도 뇌물수수 등의 죄목으로 처벌을 받고 있다. 물론 정치 투쟁에서 패배한 후 뒤집어쓴 죄명이겠지만, 우리 돈 ’16조원’이라는 뇌물수수액은 가히 그를 최고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렇듯 현재 중국 정부가 부패한 관료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내리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유취만세'(遺臭萬歲). 썩은 냄새가 만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앞서 말한 탐관오리들의 경우처럼 부정부패는 어렵게 쌓아온 명성을 한 순간에 잃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오명을 남겨 후세인들에게 경시받는 대상이 되게한다. 그깟 돈보다는 청렴과 결백으로 미명(美名)이 대대로 칭송받는 ‘유방백세'(流芳百世)가 훨씬 바람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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