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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9] 진시황제와 중국의 정체성
[2016.04.29] 진시황제와 중국의 정체성
한중관계연구원2021-01-22

중국의 정체성을 이룬 진(秦)

 

 

‘한족(漢族)’, ‘한문(漢文)’, ‘한어(漢語)’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보통 중국과 관련한 것들을 가리킬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한(漢)’일 것이다. 한(漢)은 고조 유방(劉邦)이 BC 206년에 창건한 후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가 220년에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에게 선양(禪讓)할 때까지 약 400년간 존재했던 중국 최장수 왕조이며, 더욱이 이 긴 시간 동안 통일을 유지해온 제국이었다. 한의 이러한 점 때문에 중국인들은 ‘중국(中國)’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이 이때 형성되었던 것으로 여겨 자신들을 나타내는 단어에 ‘한(漢)’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하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중국인들을 ‘중국’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 하나로 묶은 왕조는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秦, BC 221 – BC 206)이었고, 그 주역은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최초의 통일제국 진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統一帝國)이라는 말은 진이 분열 상태의 중국을 최초로 ‘하나로 합한(統一)’한 ‘황제의 나라(帝國)’라는 뜻이다. 진 이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770 – BC 221)이었다. 약 550년간 수많은 나라들이 패권을 다투었는데, 마지막 승리는 불세출의 명군인 진의 영정( 政, BC 259 – BC 210), 즉 후의 진시황제에게 돌아갔다.

 

진시황제는 먼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왕(王)’ 대신 새로운 칭호를 만들길 원했다. 그 결과 ‘덕은 삼황을 아우르고, 공은 오제를 뒤덮는다(德兼三皇, 功蓋五帝)’라며 중국 신화 속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최초로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어냈다. 자신은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에서 ‘始(처음 시)’라는 말을 썼고, 후손들이 만세까지 이어가길 바라는 의미에서 진이세(秦二世), 진삼세(秦三世) 식으로 명명하였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앞서 보았듯이 그가 새로이 만들어낸 단어는 ‘황제(皇帝)’이지 ‘제(帝)’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시황제와 ‘중국’의 정체

 

진시황제는 또 어렵게 통일한 진의 천하를 천세만세 이어가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펼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각종 통일정책이다. 춘추전국 약 550년에 달하는 약육강식의 대분열기 동안, 각국은 서로를 적대하였고, 정상적인 교류가 많지 않았다. 이 결과 마음속으로는 같은 중국인이라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제도, 문화 심지어는 언어까지 많은 것들이 달랐다.

 

진시황제는 통일제국의 안정된 통치를 위해 각국별로 달라진 모든 제도들을 진의 것을 중심으로 통일해 나갔다. 도량형(度量衡, 길이, 부피, 무게)의 통일, 화폐의 통일, 수레 폭의 통일, 문자와 언어의 통일 등은 진시황제가 이룬 위대한 업적이며, 이를 통해서 중국인들은 비로소 하나의 기준점으로 통일되어 ‘중국’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가질 수 있었다.

 

진시황제는 폭군인가?

 

하지만, 드디어 중국을 하나로 만들었던 진시황제의 위대한 업적은 다음 왕조인 한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진이 비록 550여 년의 대분열기를 종식시킨 최초의 통일제국임이 분명하지만, 그 존속기간이 BC 221년에서 BC 206년, 15년으로 너무도 짧았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진의 뒤를 이은 한은 진시황제가 이룩한 각종 통일제도를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키며, 약 400여 년의 긴 기간 동안 통일제국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정체성을 이룬 ‘대업’은 진이 아닌 한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더욱이 진시황제는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분서갱유(焚書坑儒), 만리장성과 아방궁 건설을 위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한 점 등으로 ‘폭군’의 이미지가 강하다. 진시황제의 이러한 부정적인 면이 지나치게 부각되다 보니, 중국의 정체성을 완성한 그의 위대한 업적이 가려지거나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후대의 왕조인 한이 자신의 정통을 강조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진을 폄하한 면이 적지 않다. 분서갱유는 생각보다 그 규모가 작았고, 아방궁은 진시황제 이전부터 건설해 오던 것이었으며, 만리장성은 새로이 만든 것이 아닌 그 전 나라들의 성벽을 이었을 뿐이며, 북방의 강대한 흉노(匈奴)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진시황제는 확실히 각종 통일정책을 통해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완성하였고, 이를 통하여 중국은 드디어 진정한 ‘중국’이 될 수 있었다. 15년이라는 짧은 기간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 현재 ‘한족(漢族)’, ‘한문(漢文)’, ‘한어(漢語)’를 ‘진족(秦族)’, ‘진문(秦文)’, ‘진어(秦語)’로 불렀을 것이다.

 

임상훈 교수(한중관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