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19.08.12] 동북아 식민 역사를 품은 곳, 하얼빈 | |
---|---|
한중관계연구원2021-01-28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동양의 파리”라 불리던 역사 속의 하얼빈은 천춘화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여기는 하르빈 도리(道里)공원 – 유치환, 「哈爾濱道里公園」(1942년)
하얼빈(哈尔滨), 중국의 동북, 그곳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성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이름이다. 지금이야 물론 빙등 축제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도시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역사 속에서 하얼빈은 자못 중요한 장소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년 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그 유명한 장소가 바로 하얼빈 역두였기 때문이다. ‘하얼빈 의거’는 한국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한 획을 그은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오늘날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기억의 장소로 남았다.
북으로 러시아와 근접해 있는 하얼빈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에 있어서도 각기 다르게 기억되는 특별한 도시이다. 중국에서 하얼빈은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주둔지로 기억되는 도시이며 러시아에서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의 흥망과 성쇠를 기록한 도시로 남았다. 각자 다른 이미지로 기억되는 하얼빈이지만 이 도시는 한때 “동양의 파리”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불렸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한촌이 어떻게 “동양의 파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일까?
철도의 건설과 도시의 확장
하얼빈의 도시 건설은 러시아의 동청철도건설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만주어로 “그물을 말리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얼빈’은 원래는 소수의 어민들이 거주하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895년 일청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가 동청철도부설권을 획득하게 되면서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됐다.
1897년에 착수하여 1903년에 완공된 이 철도라인은 종으로 동북 3성(헤이룽장, 지린, 랴오닝)을 관통하면서 남으로 다롄(大連)에 이르고 횡으로는 서쪽의 만저우리(滿洲里)와 동쪽의 수이펀허(綏芬河)를 잇는 T자형이었다. 하얼빈은 이 T자형의 중심에 위치하는 도시였고 러시아에 근접하면서도 철도망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우월성으로 하여 동청철도 운영의 행정중심지로 선정된다. 하얼빈의 급격한 발전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철도부설의 시작과 함께 가장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인구였다. 러시아인과 중국인의 인구 유입이 가장 컸는데, 러시아인들의 경우는 주로 동청철도의 직원이거나 관리자들이었고 중국인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하얼빈에서 각자 다른 주거구역을 형성하면서 도시의 규모를 확장해갔다.
통계에 따르면 1903년 철도가 완공되었을 당시 하얼빈의 면적은 작은 어촌에서 약 20㎢의 규모로 확대되었고 1917년이 되면 기존 면적의 약 7배에 달하는 135㎢가 된다. 1907년 상주인구는 4만, 유동인구는 10만 정도였고 1912년에 이르면 상주인구 6만 8천에 유동인구 15만이 된다. 급격한 확장 속도를 감안하고도 남는다.
이는 철도의 개통이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였고 교통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상업의 활성화로 이어졌으며 나아가 이는 하얼빈의 국제화를 가속화시켰다. 이 시기 하얼빈은 44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53개 민족이 거주하며 19개 나라의 영사관이 설치된 국제적인 무역망을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거듭나 있었다.
1911년 청나라의 멸망도, 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패배도 하얼빈의 이러한 기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비록 다롄과 뤼순(旅順)에 대한 관할권을 일본에 이양했지만 하얼빈은 여전히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있었고, 하얼빈은 “동양의 파리” 또는 “동방의 유럽”으로 통하며 당당하게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 위풍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현재도 하얼빈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각광받고 있는 성소피아 성당과 한때는 하얼빈의 금융 중심지로 알려져 있었던 기타이스카야(中央大街) 거리이다.
디아스포라의 도시 하얼빈
청나라의 멸망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하얼빈의 기세는 결국 러시아 내전에 의해 꺾이고 만다. 러시아혁명과 2년의 내전 과정에서 밀려난 백계 러시아인들과 제정 러시아군들이 하얼빈을 포함한 만주 지역에 넘쳐나게 되는데 특히 러시아인 중심지였던 하얼빈의 경우가 유독 극심했다. 1918년 6만 여에 불과하던 하얼빈의 러시아인 인구가 1922년에 이르면 15만을 훌쩍 넘어서고 있는데, 급격한 유입을 형성했던 대부분이 백계 러시아인들과 그 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청철도 내에서 러시아인들의 입지도 점점 위태로워졌다. 동청철도에 대한 관할권이 점차 중국 군벌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들은 동청철도에서 해고되었다. 일부는 러시아로 귀환했지만 더 많게는 무국적자가 되어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중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백계 러시아인들의 망명이 가장 많았는데 하얼빈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백계 러시아인들은 상해까지도 흘러들었다.
러시아 내전의 기회를 틈타 일본은 적극적으로 그 세력권을 확대해 갔다.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한 일본은 하얼빈의 동청철도 부속지를 제외한 나머지 구역을 일본의 관할권으로 귀속시키고 1935년에는 러시아에서 동청철도를 매입하면서 하얼빈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어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전쟁이 전면화 되고 장기화됨과 동시에 일본의 집단이민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한다.
특히 1937년을 시작으로 하여 1940년 초반까지 북만 지역으로의 집단이민이 진행되었는데,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의 대량 이주도 이루어졌다. 따라서 하얼빈은 이제 더 이상 “동양의 파리”로 대변되는 유럽풍의 도시가 아닌 만주국이 표방하는 ‘五族協和’를 겨냥한 ‘민족협화’의 공간으로 세팅되었다. 하지만 ‘민족협화’는 무늬뿐이었고 디아스포라의 도시 하얼빈은 쓸쓸함이 넘쳐나는 “황막”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오늘날도 하얼빈은 지난 역사를 고이 간직한 채 여전히 중국의 북녘에 임립해 있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그 옛날의 위풍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유럽식 건축물들은 지금도 하얼빈을 대변하는 중요한 특색 중의 하나이다. 러시아의 건축물과 일본의 731부대의 흔적과 안중근 기념관은 하얼빈이 겪어온 지난 세기 동북아시아의 식민 역사를 그대로 웅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