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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4] 일제강점기 노동자 이상사회 실험하다
[2021.05.04] 일제강점기 노동자 이상사회 실험하다
한중관계연구원2021-05-14

공부(公富) 이종만이 꿈꾼 대동조선(大同朝鮮)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금 생산 국가였다. 이 사실을 안 서구열강들은 앞 다투어 금광업에 뛰어들었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조선인 출신의 금광재벌도 탄생하였다. 영화배우 강동원의 외증조부로 알려진 이종만(1885~1977)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종만은  52살이 되던 1936년에 노다지 금맥을 발견하여, 최창학, 방응모에 이어서 조선의 3대 부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금광왕으로 성공하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32년 동안 무려 28번의 실패를 거듭해야만 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여 마침내 29번째에 성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종만은 이렇게 어렵게 번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1937년 5월 12일, 그는 서울의 천진루 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다. 금광을 팔아서 얻은 수익금의 3분의 1(지금의 500억)을 출연하여 ‘대동농촌사’를 설립하고, 농지를 매입하여 농부들에게 분배한 뒤에, 해마다 수확량의 30%만 의무금으로 받다가 30년 뒤에는 자영농으로 독립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광업으로 번 돈을 농민을 위해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소작농이 지불해야 하는 소작료는 최소 50%였다고 한다.
이 뉴스는 곧바로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1937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4면과 5면의 양면에 걸쳐 이종만 특집기사가 실렸다. 기사 제목만 보아도 그가 벌인 사업의  스케일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농촌이상화(農村理想化)의 제일보(第一步) ― “작인(作人)에게 전지(田地)를 표어로 자치농촌을 건설. 5십만원의 거금을 던지어 누진적으로 제2, 제3 농촌 창정(創定)」, 「대동광업회사와 중앙조합을 창립 ― 지난 6일 창립총회를 열고서 노자동체(勞資同體)의 유기조직」, 「노동자 인격적 대우와 자치제도를 실시 ― 자업(自業)같이 기쁨으로 복무」, 「종업(從業) 광부 자녀를 위해 보통학교를 설립 ― 휴게소와 시료(施療) 기관 두어」.
아울러 「가족생활은 1,2 만원으로 足(족)!」이라는 제목으로 이종만 자신의 말도 실렸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 사업을 모두 확고한 신념 아래 시작하였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농촌 문제를 생각해 왔으나, 돈이 없어 못하다가 지금 저에게 돈이 생겼는데, 이는 하늘이 저로 하여금 일을 시키려고 준 것이라 믿습니다. 가족에게는 1, 2만 원만 남겨 주면 그만이니까, 저에게 있는 돈은 모두 사회에 바치렵니다. 저는 아직 52세로 머리도 세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저를 심부름 시켜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이번 일을 너무 치하하시지 마십시오.  저보다 돈 많은 분들이 저의 이 시험에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아 사회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된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은 없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익사업을 ‘시험(실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향한 실험일까? 그 힌트는 ‘대동농촌사’, ‘대동광업회사’라는 이름에 담겨 있다. ‘대동(大同)’은 “모두가 하나 된다”는 뜻으로, 이종만은 노동자도 일을 열심히 하면 ‘똑같이(大同)’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그는 자신이 창간한 『광업조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은 살 수가 있다’는 것이 상리(常理)라 하면, ‘일 많이 하는 사람은 잘 살 수가 있다’는 것도 또한 상리(常理)일 것이다.”(제2권 제6호, 1937년 8월호, 권두언 「일 많이 하고 잘 살아보자」).
‘상리’란 ‘상식적인 이치’라는 뜻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진리를 말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을 실현해 보려는 이종만의 실험에 대해 당시의 『동아일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런 갸륵한 독지가의 토지가 불행히 157만평에 불과하여 그 은혜를 입은 소작인이 겨우 157호에 그치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1937년 9월 17일자)
부동산 부자에게 땅이 더 있기를 바란다니, 요즘 같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반세기 동안 ‘이종만’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버렸다. 마침 내년 1월 17일에 김반아 박사가 기획한 ‘이종만 학술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 학술포럼을 계기로 이종만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조성환 교수(원광대 HK+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출처 : 원대신문(http://www.wk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