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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31] 한국유이민사와 용정
[2021.03.31] 한국유이민사와 용정
한중관계연구원2021-03-31

용두레 우물, 용정촌(龍井村)을 아십니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윤동주, 시인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 윤동주에 대한 논의가 다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해 있으면서 중조변경에 인접해 있는 용정은 여러 모로 유서 깊은 땅이다. 오늘날 우리는 윤동주를 통해 용정을 알게 되었지만 해방 전 용정은 서울에 비견되는 교육·문화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던 명실상부한 간도(間島)의 서울이었다. 특히 1910~20년대 용정은 사상, 문화, 교육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앞서나갔던 선도적인 공간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용정은 1919년 3월 13일의 만세운동을 이끌 수 있었고 항일독립운동의 근원지로 기억될 수 있었다. 사실 용정의 이러한 위상은 그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유이민사에서 용정은 조선 이민의 첫 동네가 형성되었던 공간으로 기록된다.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1877년이다. 당시 조선 평안북도의 이재민 김언삼(金彦三)과 함경북도의 이재민 장인석(張仁碩), 박윤언(朴允彦) 등 장정들이 14세대의 토스레옷을 걸치고 짚신을 신은 남녀노소를 거느리고 회령(會寧)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합(三合)에 이른 다음 다시 오랑캐령을 넘어 하루 종일 걸어 당도한 곳이 바로 해란강 기슭의 충적평원이었다. 육도하와 해란강 두 강의 합수목이었던 이 평원지대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키 넘는 잡초가 무성했고 황량하기 그지없었지만 토지가 비옥하고 흐르는 물 또한 맑아 농사짓기에 알맞은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14세대가 짐을 푼 곳이 바로 육도구(六道溝)라는 곳이었다. 후에 기후가 좋고 농사가 잘 된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에서 한 집 두 집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점차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러다 1886년 정준이라는 젊은이가 봄에 밭을 갈다가 옛 여진인(女眞人)들이 사용하던 우물을 발견하였고, 사람들은 그 우물을 다시 복원하여 사용하게 되면서 우물에 용두레를 설치하였다. 마을 사람 장인석이 용두레 용(龍)자와 우물 정(井)자를 합쳐 마을의 이름을 ‘용정촌(龍井村)’이라고 지었고 1900년부터는 청나라 관방에서도 육도구와 용정촌을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만주사변 후 정식으로 육도구를 용정촌이라 명명하였다. 말하자면 용정촌은 조선인 이민의 첫 동네였고 ‘용정’이라는 그 이름 역시 조선인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었다.

마을의 규모가 점차 커지기 시작하면서 동네에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 신식학교가 바로 1906년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이었다. 하지만 서전서숙은 1907년 5월, 용정에 조선 통감부 용정파출소가 설립되면서 개교한지 8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되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이상설이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면서 용정을 떠나게 된다. 후에 서전서숙의 사생들이 명동의 김약연과 협의하여 그가 운영하던 서당인 규암재를 정리하고 1908년 4월 27일에 김약연을 숙장으로 하는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다. 이 명동서숙이 바로 윤동주가 졸업한 명동학교의 전신이었고 김약연이 바로 윤동주의 외삼촌이었다.

용정의 발전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전서숙, 명동서숙을 비롯한 학교 설립은 용정을 교육·문화적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반일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학교의 교육 이념은 용정 조선인들의 항일 투지를 일깨우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춘화 교수(원광대 HK+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출처 : 원대신문(http://www.wk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