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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1.07.16] 중국 공산당, 1억 명 당원 눈앞
[2021.07.16] 중국 공산당, 1억 명 당원 눈앞
한중관계연구원2021-07-16

중국공산당 100, 생존과 성장의 비결

김영신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HK+연구교수

 

중국공산당(중공) 중앙조직부가 발표한 최신 통계에 따르면 2021년 6월 5일 현재 중공당원은 9514.8만 명에 달한다. 한 세기 전 50여 명의 당원으로 출범했던 중공의 성장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는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생존과 성장방략이 적중한 결과다.

 

마오쩌뚱(毛澤東)이 정한 창당기념일

 

1921년 7월,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당원 57명을 대표한 13명이 참석한 회합이 있었다. 이 모임이 중공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전대회)이다. 마오쩌뚱은 창사(長沙) 대표로 출석하였다. 중공 1전대회는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마링(Maring, 원명 Sneevliet)과 보이틴스키(Gregorii N. Voitinskii)가 열석하여 지도했다.

 

회의 도중 들이닥친 조계 순포(巡捕, 경찰)들을 피해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에 위치한 남호(南湖)의 선상에서 회의는 마무리됐다. 출석 대표들의 기억이 각기 달라 후일 중공 창당기념일에 대해서는 7월 23일, 7월 27일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됐다.

 

중공 창당기념일이 7월 1일로 정해진 것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1938년 5월, 마오쩌뚱이 ‘지구전을 논함'(論持久戰)이라는 글에서 “금년 7월 1일은 중국공산당 건립 17주년 기념일”이라고 언급하면서 처음으로 ‘7.1기념일’의 개념을 제출했다. 이 주장은 1941년 열린 4전대회에서 확정됐다.

 

1차 국공합작과 중공의 성장

 

1922년 7월 항저우(杭州)에서 중공 2전대회가 개최됐다. 천두슈(陳獨秀) 등 20여 명의 대표들은 정식으로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결의하는 동시에 국민당과 연합전선 결성을 결정했다. 2전대회의 결정에 따라 중공은 그간 공격과 배척의 대상이었던 국민당에 대해 호감을 표시했다.

 

코민테른이 재차 파견한 마링은 8월 22일 항저우에서 천두슈 등과 회합을 갖고 중공당원이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할 것을 제의했다. 계급성과 독립성 상실의 위험이 있다는 중공 지도부의 반대에도 마링은 코민테른의 결정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여 공산당원의 개별적 국민당 입당이 결정됐다.

 

이 결의안은 다음해 6월 광저우(廣州)에서 열린 중공 3전대회의 추인을 받았다. 아울러 중공 3전대회는 국민당의 간판을 내걸고 노동자·농민운동을 적극 진행하여 국민혁명의 영도권을 쟁취하자고 결의하였다.

 

1924년 1월 광저우에서 개최된 국민당 1전대회는 ‘국공합작’을 공식화했다.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한 중공당원이 국민당 조직부장과 농민부장을 차지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군법처장에 임명됐다. 후난성(湖南省) 지방당무를 맡은 마오쩌뚱을 비롯한 국민당 내 중공당원들도 세력 확장에 전념했다. 이에 힘입어 1925년 1월 4전대회 시 중공당원은 950명으로 증가했다.

 

위기를 극복한 성장방략

 

국민당에 ‘기생’하며 신속히 세력을 확장한 중공은 1925년 3월 쑨원(孫文) 사후 혁명영도권 쟁취를 위한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경각심을 가진 국민당 핵심은 1927년 4월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을 단행하여 국공합작은 파국을 맞았다.

 

창당 이전부터 도시지역에서의 세력 확장에 주안점을 두었던 중공은 국공합작 결렬 후 농민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산악지대에 ‘소비에트’를 건립하고 지난한 생존투쟁에 나섰다. 맨 먼저 정강산(井崗山) 산악기지를 건립한 주축 인물은 마오쩌뚱이다.

 

마오쩌뚱은 이어 장시성(江西省)과 푸젠성(福建省) 접경지대의 소도시인 루이진(瑞金)을 중심으로 중앙근거지를 건립하고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방략을 채용했다.

 

마오쩌뚱의 방략은 정확한 것이었다. 1927-1930년 중공은 화남지역을 중심으로 12군(軍)의 홍군(紅軍)을 조직하였다. 장쑤(江蘇)·허베이(河北) 등지에서는 유격대가 활발히 활동했다. 1934년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소비에트 내에 약 27만 명, 비소비에트 지역에 1만 6000명의 중공당원이 존재했다.

 

▲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인 1일(현지 시각) 수도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 겸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경축 연설을 하고 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중화민족이 당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대내외에 선언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옌안(延安)시대 중공의 발전방략

 

1930년 12월,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중공 중앙근거지에 대한 포위공격을 시작하였다. 1933년 4월까지 네 차례 공격은 모두 무위로 끝났다. 국민정부는 1933년 10월 17일부터 총병력 80만 명을 동원한 제5차 공격작전을 진행했다.

 

대규모 공세를 견디지 못한 중공 주력은 1934년 10월 15일 루이진을 벗어나 1936년 11월까지 이어지는 2년간의 전략적 이동을 단행했다. 이를 만리장정(실제 이동거리는 2만 5천리)이라 한다.

 

제1차 국공합작 결렬 후 중공은 생존을 위해, 국민당의 통치권을 탈취하기 위해 10년 간 무력항쟁을 지속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만리장정을 거치면서 중공의 무장역량은 이전에 비해 쇠약해졌으나 줄기차게 항일(抗日)을 표방했다. 이는 공산주의에 경도되거나 공산당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대폭 증가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여론의 변화에 고무된 중공은 종래의 무장투쟁노선을 버리고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세력발전을 꾀했다. 이른바 ‘항일통일전선’을 전면 추진한 것이다.

 

일본과의 전면전이 폭발하자 중공은 1937년 7월 22일 ‘국난 극복을 위해 함께 분투할 것’을 선언했다. 국민당정권 전복을 목표로 하는 무장투쟁을 취소하고 삼민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에 화답하여 8월 22일 장제스는 주더(朱德)와 펑더화이(彭德懷)를 국민혁명군 제8로군(후일 제18집단군으로 개칭) 정·부총지휘에 임명하고 항일전선에 동참할 것을 명했다. 이들은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항일전쟁에 종사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으나 실제로는 마오쩌뚱의 지시에 따라 중공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중일전쟁기 중공은 자신들의 통치구역을 ‘항일근거지’라 칭하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말 중공은 전국 각지에 16개의 항일근거지를 건립했다. 이 지역의 인구는 약 8000만 면, 야전 군인수는 약 35만 명에 달했다.

 

중공이 신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사회기층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현(縣) 이하의 단위를 중심으로 정권, 군사계통, 민중단체와 당부(黨部)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정치구조를 도입했다.

 

정권을 예로 들자면, 현 아래 기층에 향장(鄕長)·촌장(村長) 및 각급 인민대표를 설치하였다. 군사계통으로는 지방무력과 민병을 두었다. 농민항적회(抗敵會)·노동자항적회·청년항적회와 부녀항적회 등등 민중단체가 설치됐다. 이들 각기 다른 계통의 조직 배후에는 농촌지부 등 중공 조직이 존재했다.

 

각급 당부의 책임자들은 ‘당 일원화’ 정책에 근거하여 동급의 정권기구, 군사무장 및 민중조직을 지휘했다. 국민당이 갖지 못한 다양한 형태의 기층조직을 통해 당의 영향력이 농촌 기층사회에 확실하게 침투한 것이 중공 생존과 성장의 비결이었다.

 

중공의 양적, 질적 성장과 중국의 장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1949년 10월 당시 중공당원은 448.8만 명에 달하였다. 창당 28년 만에 단순계산으로 당원수가 8만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공당원은 연평균 200여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조만간 1억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35세 이하 젊은 당원이 전체의 25% 가량을 점하고 있고 그 비율은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이다. 전문학교 졸업 이상의 고학력자 비율도 절반 이상에 달한다. 양과 질 두 방면에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공이 중국의 장래 발전방향을 어떻게 설정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겠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71608504311170#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